도보다리서 평양까지 여무는 평화분위기
위장평화쇼로 딴죽거는 이중적 세력들

야간 근무를 하고 한숨 자다 일어난 늦은 점심나절이 후텁지근하다. 지난봄부터 여름 동안 달구어졌던 열기를 채 삭이지 못한 햇살이 거실 깊숙이 밀고 들어와 앉았다. 그 옛날 할머니는 달력이 없어도 앞산 탕건바위 왼쪽으로 해가 저물면 백로를 지나 추분이라며 밭에 나가 목화송이며 참깨며 붉은 고추를 이고 지고 오셨다.

시계가 없어도 섬돌을 내어주며 물러나는 처마 그늘을 보고 점심상을 들이라 하셨다. 봄볕과 가을볕은 또 달랐다. 얼어붙은 대지를 녹인 봄 햇볕은 따스했지만, 엄동설한 칼바람에 긁히고 베여 닿으면 따갑고 쓰라렸다. 유독 이 나라의 봄볕은 더 아프고 깊은 상처가 많았다. 제가 녹여 다시 흐르는 여울의 물비늘에도 제대로 내려앉지 못하고 퉁겨져 나왔으니 말이다. 봄볕은 여리고 맑은 듯해도 모질고 헛헛했다.

"지리지리… 지배지릿종" 하는 지저귐만 가득 울리는 하늘 어느 구석에도 노고지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따가운 햇볕을 등짝에 고스란히 받으며 논에 모를 꽂고 밭을 갈았다. 쓰리고 아프지만, 그 햇살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봄볕과 달리 가을볕은 지난여름 내내 뜨겁게 달구어진 탓에 채 식지 않았으나 푹 끓인 사골 곰국처럼 부드럽고 구수하다. 가을볕은 달뜨지 않고 고즈넉하며 익어가는 향기가 배어 있다. 거두어들이는 넉넉함이 넘치는 햇살이다.

지난봄 평창에서 풀리기 시작한 봄 햇살이 판문점 도보다리에 화사하게 내려앉았다. 그동안 햇살이 퍼지지도 못하게 상처를 입히던 이들이 남북 위장평화쇼 퍼주기라며 화살을 퍼부었지만, 함께 모를 꽂고 밭을 갈았다. 모종이 뿌리를 내린 초여름 다시 함께 거름을 주고 이웃 마을 트랙터를 빌려 북을 돋우고 김을 맸다. 온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일하는 중에도 여전히 묵은 상처를 긁어 부스럼이 나게 만들려는 이들은 목청을 높였지만, 햇살 누그러지고 그런대로 들판은 잘 여물어갔다.

이 사람들 아직 적으나마 첫 가을을 거두려는데 또다시 딴죽을 걸고 나온다. 통일은 해야 하지만 판문점 선언 비준은 동의 못 하겠단다. 어떤 이는 대북제재를 풀지 말고 비핵화 시간표부터 받아오라며 경협은 안 된다 한다. 서로 화해하자는 사람끼리 한쪽에게 네가 흉기를 숨긴 게 많은듯하니 손 뒤로 묶고 호주머니 탈탈 털고 몸수색부터 하자 하는 꼴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비핵화 회담과 통일 방식은 힘과 경제력으로 누르고 옥죄어 굴복시켜 발가벗기기부터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체 기술력으로 초강대국과 상대하고 있다. 굴속에 숨어 나오지 않던 승냥이 새끼가 아니라 이미 사자로 자라났기에 당당히 나와 손을 내밀었다. 이런 상대를 우격다짐으로 다루겠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다.

'어느 날 해에게 바람이 수작을 걸더래. 제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다고 자랑을 하는데 아름드리나무도 고래 등 같은 집채도 다 날려버릴 수 있다고 으스대는 거라. 해도 질세라 강물을 말리고 들판을 태울 수 있다고 대꾸를 했지. 그러다 누가 더 힘이 센지 내기를 하게 되었어. 마침 들판을 건너가는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가 입은 외투를 빨리 벗기는 쪽이 더 힘이 센 것으로 하자 했어. 먼저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어. 그러나 바람이 세지면 세질수록 나그네는 옷깃을 감싸 쥐고 웅크렸어. 지친 바람이 포기하자 이번엔 해가 따뜻하게 쪼였대. 그러자 나그네는 옷을 벗어들고 가더란다.' 예닐곱 살 아이들도 알아듣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이 참 딱하다. 오늘은 남 누리 북 누리 온 누리에 가을 햇살이 찰랑찰랑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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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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