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에 가로막힌 4·19혁명성지
최루탄에 숨진 열사 시신 인양지
2011년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
벽화는 주차 차량에 가려 안 보여
화장실 등 편의시설 없어 불편

1960년 3월 15일 불법 선거를 가장 먼저 거부한 마산. 이날 시위대와 경찰 간 공방이 이어지면서 7명이 사망하고 1명이 행방불명됐다. 또한 부상자도 여럿 발생했다. 북마산파출소가 불타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서 21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대부분 2~3일 구류 후 석방됐는데, 인권유린도 있었다. 북마산파출소 방화범으로 지목된 박세현(당시 22세)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 씨는 3월 15일 밤 길을 걷다 경찰에 붙잡혔다. 자동차 면허증이 나오자 경찰은 그를 방화범으로 지목한 후 '6·25 부역자'라고 발표했다. 얼마 안 돼 그의 나이는 22세에서 32세로 바뀌어 있었다. 박 씨가 6·25전쟁 당시 12살이어서 부역했다고 갖다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말은 이렇다. 박 씨의 자동차 면허증을 본 경찰이 양동이·유리병·헝겊을 들이밀었다. 경찰은 "네가 이 바케쓰(양동이)에다 휘발유가 든 병을 넣어가지고 북마산파출소에 던진 다음 솜에 불을 당겨 방화했다고 진술하라"고 했다. 발길질 등에 못 이긴 박 씨는 "네, 네"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벽화가 주차 차량에 가려져 있다. /류민기 기자

◇4·11민주항쟁의 시작 = 4월 11일 오전 11시께였다. 마산항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출동한 경찰이 근처에서 홍합을 채취하던 어부에게 시신 인양을 시켰다. 오른쪽 눈에서 뒤통수에 이르기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행방불명됐던 17세 김주열이었다.

1944년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난 김주열은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응시, 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장군동 이모할머니 집에서 형과 함께 기숙하고 있었다. 3월 15일 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권찬주 여사는 마산 시내를 헤매며 아들 행방을 수소문했다. 이 사연은 곧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전국적으로 예의주시하는 일이 됐다.

시신은 도립마산병원 영안실에 안치됐다. 병원 주위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기세에 눌린 경찰이 정문을 열어줬다. 일부 학생은 '3·15 영웅 김주열 군의 시체 발견', '협잡 선거 물리치자'고 쓴 현수막을 붙였다. 더러는 시신을 메고 시가행진을 하려고도 했다.

오후 5시께 창동과 남성동파출소 일대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저녁 6시부터는 학생·시민 등 3만~5만여 명이 병원 앞에 모여 '전우가', '통일행진곡' 등을 불렀다. 시내를 돈 민중은 7시 30분께 마산경찰서로 향하며 "학살 경관 처단하라", "이기붕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이어 "이승만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4·11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주차 차량에 가려진 벽화 =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4.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가 있는 곳이다.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노력 끝에 2011년 9월 22일 경남도 기념물 제277호로 지정됐다.

김영만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는 "도로 쪽 벽화는 주차 차량으로 항상 가려져 있다시피 한다. 김주열 열사 시신이 인양된 곳인데 첫인상부터 제대로 보존된 모습을 못 보이는 것"이라며 "벽화를 따라 50m 정도만 주차금지구역으로 지정해달라고 창원시와 경찰에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관련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검토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없다. 김 대표는 "여기서 20~30분 정도 해설을 한다. 단체 탐방객이 올 경우 화장실을 찾는데 안내할 수가 없다"며 "참거나 주변 외진 곳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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