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불상의 손모양, 무엇을 의미할까
불교가 처음 전래됐던 시기
오른손 위로 향한 '시무외인'
왼손은 아래로 내린 '여원인'
"두려움 없애고 소원 들어준다"
부처·두 보살이 공존 삼존불
하나의 양식으로 크게 유행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하고, 처음 만든 불상은 앉아서 선정을 하는 모습의 상이었다(선정인 좌상). 선정인은 불상의 주인공이 부처라는 것만 말해줄 뿐, 어떤 부처인지는 알려주지는 않는다. 이런 손모양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인, 통인(通印)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런 통인을 한 불상들은 불교가 처음 알려지던 시기, 바로 이 불상이 부처님이야! 하는 것만으로도 임팩트가 있을 시절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번 회는 대표적인 통인 중 하나를 더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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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외인과 여원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인데 이 불상은 정확하게 만든 연대를 알 수는 없다. 중국의 경우를 비교해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는 상황이다.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이다(사진1). 불상 뒤편에 '연가7년(延嘉7年)'으로 시작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사진 1-1)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연가는 왕들의 재위시기에 사용했던 연호(예를 들어 고구려광개토대왕의 연호는 영락이고, 영락 9년이라 하면 광개토대왕이 등극한 지 9년째 되는 해라는 말이다)로 생각되는데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실제로 연가7년을 통해서 특별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명문 전체를 보면 평양 동사(東寺)에서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고구려의 연호일 것이고 '연가7년'에 이어서 나오는 '己未年'을 근거로 53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불상은 받침대(대좌) 위에 부처가 서 있고 부처님의 법력을 상징하는 빛(광배)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손모양에 주목해보자. 양손 모두 활짝 펴고 있는데 오른손은 손끝이 위로, 왼손은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손을 펴고 손가락을 위로 향한 수인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 한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두려움(畏)을 없애는(無) 것을 베푼(施)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 손가락 끝 부분을 땅으로 향한 모습의 수인은 여원인(與願印)이라 한다. 원하는 것(願)을 들어준다(與)는 의미가 있다. 시무외인과 여원인은 대부분 같이 표현된다. 그래서 의미를 합쳐보면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정도의 의미가 있는 수인이다. 처음 불교가 들어올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참으로 시의적절한 수인이라 할 수 있다. 일부 불상들 중에는 손바닥을 완전히 펴지 않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말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것들도 모두 시무외인, 여원인으로 본다. 이 수인은 삼국시대 불상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3존불' 시대

그러고는 부처 한 분이 두 분의 보살과 함께 표현된 3존불의 시대가 열렸다. 아마 불교가 한 명의 부처하고만 관련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유물일 것이다. 통상 가운데 부처는 크게, 그리고 양옆의 보살은 작게 만들어서 위계가 다름을 나타내고,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이 세 분을 모두 감싸는 커다란 광배가 있어 이런 불상들을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이라 한다. 재미있게도 이 일광삼존불의 뒷면에는 연가7년명 불상처럼 만든 시기와 이유를 새겨 놓은 것들이 많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살펴보자.

사진2는 계미명금동삼존불이다. 광배 뒤편에 계미년 11월 1일 보화라는 사람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보통 금동삼존불은 부처, 대좌, 그리고 협시보살과 광배 이 세 가지를 따로 만들어서 조합하는데 이 불상은 이 모든 게 전부 남아 있는 귀중한 사례다. 계미년은 563년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8년 후인 신묘년에 만들어진 금동삼존불(사진 3)도 유명한데 이 불상에는 5명이 함께 이 불상을 만들었고 돌아가신 스승, 부모님이 후대에 태어날 때마다 여러 부처를 기억하고,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런 일광삼존불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 특히 고구려나 백제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크게 유행했으며 일본으로 전해져 동북아 삼국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유물이다.

<되찾은 '소답동불상' '보살상'으로 불러야>  

지금까지 5회에 걸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지만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실제 사례를 가지고 한번 복습해보겠다. 대상은 9월 6일 경남도민일보 헤드라인을 장식한 '소답동불상'(사진)이다. 이 불상의 이름을 살펴보자.

기사에는 '창원 소답동 마애석불좌상'이라고 언급되어있는데 일단 장소가 창원 소답동이 석불이 있던 지명이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불상에 특별한 명문이 없는 듯하니 '(창원) 소답동'으로 시작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불상일까? 문제가 생기기 전 사진을 보니 필자가 불상의 대표적 특징으로 말했던 머리카락이 확인되지 않는다. 나발도 소발도 아니고 육계도 없다. 머리를 네모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을 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법의 외에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 불상의 속성을 봤을 때 부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또 오른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고 오른쪽 어깨 위로 이어져 있는데 꽃봉오리 같아 보인다. 아마 연꽃일 텐데 이것 또한 보살의 속성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 '소답동 불상'은 '소답동 보살상'이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마애불이 아니다. 마애는 절벽(崖)에 새겨(磨)서 만든 불상이다. 이 석상처럼 독립된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은 그냥 석상이다. 적어도 마애상은 옮기기 몹시 어려운 큰 돌에 새겨서 만들어야 마애불이라 할 수 있다. 좌상이라는 말도 조금 부족하다. 왼쪽 발은 의자로 보이는 물건에 걸치고 오른발을 아래로 내린 모습이다. 통상 이런 모습을 반가상이라고 말한다. 가부좌를 하고 있던 상태에서 한 발을 풀어 내린 모습이기에 반가라고 한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반가가 이런 모습이다. 사유는 생각한다는 말이니 반가사유는 반가를 한 채 생각하는 모습이다. 가부좌를 한 채로 반가사유를 할 수는 없다. 동그랗게 네모를 그리라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정리하자면 '창원 소답동 마애석불좌상'은 '창원 소답동 석조 보살 반가상' 이렇게 하거나 그냥 '소답동 보살상' 정도가 더 적절한 이름일 것이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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