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이상적인 거리 만드는 과정
한 뼘이라도 다가서려 노력해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수필집 몇 권을 들고 길을 걷다가 눈에 들어온 한 쌍의 중년 남녀를 보고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인 사이 걸음은 여자가 빠르고 부부 사이 걸음은 남자가 빠르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각기 우산을 따로 쓰고는 남자의 두어 발짝 뒤에서 아리잠직한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쫓아가고 있었다. 그 여인에게는 목적지 외에 다른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한때는 그 역시 조심조심 우산을 받쳐주는 누군가가 필시 있었으리라. 이젠 데면데면한 거리에 익숙해진 듯 체념하는 여인의 영락없는 모습을 보자니 돌연 마음이 짠해졌다.

관심이 줄어들면 상대와의 거리도 멀어지는 법이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큰 골목을 돌자 또 다른 풍경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가게에서 한 여인이 우산도 없이 나왔다. 곧바로 한 남자가 뒤따라 나오며 윗도리를 벗어 여인의 머리 위로 펼치면서 둘은 발을 맞추어 뛰어가는 게 아닌가. 둘 사이에 웃음이 쏟아졌다. 부부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가 사이를 좁히면서 가장 이상적인 거리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찻집에 들어섰다.

실내 분위기가 구수하게 느껴졌던 건 비단 커피 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목이 되어서까지 하나가 된 연리지처럼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노부부가 나란히 붙어 앉아 정감을 나누는 모습이 아름답고 향긋했다. 할머니는 안색이 편찮은 것으로 보아 병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저문다는 것에 대한 애잔함 때문일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안쓰러운 듯 한쪽 팔로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눈길을 그윽이 맞추면서 "좀 괜찮나?" "커피보다 따뜻한 레몬차가 낫겠제?"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할머니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근기(根氣)를 살피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그윽한 눈빛과 가만히 올려다보는 고운 눈빛이 나의 시선을 억세게 끌어당겼다.

참으로 별별 시선이 나에게 비훈(丕訓)을 주는 하루였다. 세월이 지나면 점점 부부의 거리가 멀어져 사랑이 메말라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부가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며 행복을 이어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걸 보았다.

한 정신분석 전문의는 상호 거리에 따른 사람들 간의 관계를 소개했다. 부부나 연인 사이는 20㎝, 친구 사이는 46㎝, 회사 사람들과의 사이는 120㎝가 적당하다고.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서로 기대고, 보듬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더구나 결혼은 두 사람이 평생을 같이 살기로 작정한 부부의 관계이다. 따라서 서로 한 뼘이라도 먼저 다가가 눈 맞추고 날마다 소소한 추억을 만들며 행복을 공동으로 만들어 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부부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것은 왤까. 상대방을 아낀답시고 그를 뜻대로 휘두르려고 하고, 그의 문제를 시시콜콜 고쳐주고 해결해 주려고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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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한 사람.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동반자. 그런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이제야 비로소 늘 내 곁에서 나를 향해주며 내 편이 되어준 아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 부부의 거리는 얼마쯤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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