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에 꼭꼭 가려진 기념비, 탐방객 숨바꼭질해야 할 판
경찰 총격서 사람 살린 '구명석'
고 신동식 씨, 자비로 비석 세워
창원시 조성 화단 '관람 장애물'
시민단체 철거 요구에도 미조치

1960년 3월 15일 밤 8시. 무학국민학교 앞 전봇대가 소방차에 부딪혀 넘어가자 마산 시내가 암흑으로 변했다. '탕' '탕' '탕'.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대오 앞줄에 있던 학생이 쓰러지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남성동파출소, 마산시청 앞에 있던 시위대 일부가 북마산으로 향했다. 이들이 마주한 건 북마산파출소. 여러 갈래서 오던 이들이 합류해 파출소를 에워쌌다. 이곳에서도 총탄이 날아들었다. 시위대는 돌멩이를 던지며 맞섰다.

인근에 돌공장이 있었다. 더러는 총탄을 피하려 공장에 들어가 숨었다. 전기가 끊긴 탓에 파출소에선 석유램프를 켜놓고 있었는데, 시위대와 경찰 간 공방이 이어지던 중 석유램프가 넘어져 불이 붙었고, 얼마 후 건물 전체로 번졌다. 9시 30분께였다. 이날 북마산파출소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 공방이 가장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곳에서 3명이 사망하고 다수 부상자가 발생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102-6에 있는 3·15구명기념비. /류민기 기자

◇"총까지 쏠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 3월 15일 그날, 경찰이 실탄을 쏴야 했을 만큼 상황이 긴박했을까. 당시 대한변호사협회는 진상조사단을 꾸려 마산에서 일어난 일을 조사했다. 22일 현지 조사를 끝낸 대한변협 결론은 '총까지 쏠 긴박한 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였다.

이날 경찰이 무학국민학교 모퉁이 길을 돌아서 총을 쐈으며, 학교 정문 좌우 담장에 남은 탄흔 또한 사람 키 크기를 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뿐 아니라 무학산 기슭 집안에 있던 네 살 아이가 총에 맞아 죽은 사실로 미뤄 경찰 발포를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변협 조사단은 이날 시위가 조직된 세력의 조종·책동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번호표를 못 받은 유권자들이 동회(동사무소)를 찾아가 항의한 결과 그들의 번호표가 경찰관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중 몇 사람은 그 경찰관들로부터 도로 찾아 투표한 일도 있다. 이 같은 사례는 번호표를 찾으려 모여든 이들의 마음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102-6에 있는 3·15구명기념비가 화단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류민기 기자

◇화단에 가려져 있는 3·15구명기념비 =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102-6. '3·15구명기념비'가 있는 이곳은 1960년 3월 15일 당시 시위대와 북마산파출소 경찰 간 공방이 벌어진 곳이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고자 돌공장에 있던 돌 뒤로 몸을 숨겼다.

파출소 인근에 살았던 신동식(당시 69세) 씨는 집 앞에 자연석을 세워뒀다. 사람들은 총탄을 피해 이 돌 뒤로 숨었는데, 경찰이 쏜 총탄에 상단 귀퉁이가 부서지기도 했다. 신 씨는 이 돌을 두고 사람 목숨을 구한 구명석이라며 3월 15일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그러고 나서 자비를 들여 비석을 세웠는데, 이때가 1962년이었다.

"한 조각의 돌을 길가에 세워 의로운 역사를 새겨 두노니 이는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시민들의 노함은 막기 어려우며 뜨겁게 흘린 피는 역사에 남으리라.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은 이를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으리."

김영만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는 "비석이 세워진 곳 바로 옆에 도로가 있어 탐방객들이 이곳에 올 경우 차량을 댈 수가 없다"며 "차량 안에서 설명하려고 해도 화단에 가려져 할 수가 없다. 사진 한 장 찍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화단을 만들 때 창원시에 이유를 물어보니 구명비 주위에 쓰레기가 많이 버려져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쓰레기가 버려진 일을 본 적이 없다"며 "2010년 화단이 만들어진 이후 시민단체가 철거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시에서 조치가 없다. 누군가 쓰레기를 버리더라도 치우면 될 일이다. 행정 편의 때문에 역사적 현장을 가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질타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