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명문 집안들, 풍경 좋은 곳에 별장 경영
달이 비치는 연못 '월연대'비경에 감탄 절로
오연정, 후대 서원으로…반계정 '소박함'자랑

밀양강 하면 영남루가 너무 이름높아 밀양에는 다른 누각이나 정자는 잘 눈에 들지도 않는다.

영남루가 둘도 없이 멋지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영남루가 영남루인 까닭이 둘 나온다. 하나는 영남사(嶺南寺)의 누각이었는데 절이 없어진 뒤 밀양군수 김주(1339~1404)가 1365년 고쳐지으며 절간 이름을 갖다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초기 고관대작 신숙주(1417~75)의 기록이다.

"어느 고을이나 누각이 있기 마련인데 대체로 무엇이 보이는지에 따라 이름지었다. 하지만 이 누각만 '영남'이라 했는데 이는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다."

월연당에서 문을 통해 밖을 바라본 모습. 가까이 배롱나무의 꽃이 붉고 멀리 강변의 풀빛은 푸르다.

◇밀양 명문의 별장 월연대(月淵臺)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산 좋고 물 좋은 데가 밀양강에 하나뿐일 리 없다. 밀양은 물산이 풍부한 덕분에 건물 몇 채 정도는 짓고도 남을 정도로 재력을 갖춘 집안이 적지 않았다.

먼저 본관이 여주인 월연 이태(1483~1536년)가 있다. 할아버지 이증석은 서울에 살았는데 양녕대군의 외손자였고 아버지 이사필은 1498년 무오사화를 피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외가와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들어왔다.

이태는 1510년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한 뒤 예문관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 직전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아버지처럼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화를 면한 이태는 이듬해 월연대 일대에 월연당과 쌍경당을 짓고 스스로를 월연주인이라 일컬었다.

월연대는 추화산 기슭에 있다. 가지산에서 발원한 동천이 밀양강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앞선 시기에는 월영사(月影寺)라는 절간이 있었던 자리다. 원래 있었던 절간과 새로 들어선 별장 이름에 모두 달이 들어 있다. 달 그림자(影)와 달 연못(淵)이다. 두 물이 합해지면 절로 흐름이 느려져 호수처럼 보인다. 한밤중 하늘에 두둥실 달이 뜨면 물 위에도 달이 하나 더 뜨게 마련이다.

월연당이 언덕배기 높은 자리에 우뚝 솟은 반면 쌍경당은 아래쪽 평평한 데 있다.

월연당은 한 칸이지만 쌍경당은 다섯 칸이다. 쌍경(雙鏡)은 똑같이 닮은 거울 두 개를 말한다. 옛날 거울은 지금과 달리 둥글었다. 거울처럼 둥근 달이 하늘에 하나 있고 물 위에도 하나 있다. 이태는 이런 풍경을 쌍경당 마루에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혼자서 맑은 술을 한 잔 더하거나 아니면 손님을 한 명 청해 모시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술잔마다 달이 하나씩 더해져 모두 셋이나 넷이 되곤 했겠지.

◇오연정과 금시당·백곡재

월연대에서 용평터널을 거쳐 1.5km 정도 상류로 오르면 오연정(鼇淵亭)이 나온다. 밀양이 본관인 손영제(1521~88)가 벼슬살이를 마치고 1580년 지었다. 추화산 자락인데 물줄기가 활처럼 크게 한 번 휘어지는 대목이다. 담장 바깥 소나무 사이로 앞을 내려다보면 부드럽게 굽은 강변 풍경이 평온한 느낌을 준다. 강물이 빨리 내달리기 때문인지 흐르는 물소리도 쾌활하다. 옆과 뒤로는 느티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왕버들 등 노거수들이 멋진 풍경을 거든다.

오연정 뒤편 단풍나무는 세 길을 훌쩍 넘는 크기로 크면서도 단정하다. 처진 가지를 들고 그늘로 들었더니 바위가 두엇 포개져 있다.

'모례서원 유지(慕禮書院 遺址)'라 새겨져 있는 것은 위쪽 바위다. 처음 시작은 정자였지만 1700년대 후반~1800년대 초반 후손들이 서원으로 바꾸었다. 아이들 공부 가르치는 경행재(景行齋)와 목판을 보관하는 연상판각(淵上板閣) 등 다른 건물들이 더해져 있는 까닭이다.

들머리 언덕에는 물기를 좋아하는 왕버들 한 그루가 우람하다. 바로 옆 움푹 파인 자리에 물이 고여 있고 鼇淵(오연)이라 새긴 빗돌도 하나 있다. 자라(鰲)가 사는 못(淵)이다.

오연은 오봉(鰲峯)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황금자라가 떠받치는 신선이 사는 다섯 봉우리가 오봉인데 나중에 한림원=예문관의 별명이 되었다. 예문관 벼슬은 잡스럽지 않고 명예롭게 여겨졌다. 다들 이를 바라는 심정으로 여기서 공부를 했겠지.

월연대가 두 물이 합해지는 자리라면 금시당(今是堂)은 그렇게 합쳐진 물이 둘로 나뉘는 자리다. 밀양강은 여기에다 서로 엉겨붙은 섬을 두 개 만들어 놓았다. 옛적에는 이렇게 엉긴다(凝)고 하여 밀양강을 응천(凝川)이라 했다. 상류쪽 섬은 곡식이 자라는 농경지고 하류쪽 섬은 사람 사는 주거지다. 금시당은 강물이 상류쪽 섬을 맞아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자리에 있다.

여주 이씨 집안 이광진(1513~66)이 1566년 지었는데 풍월을 노닐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 자제들 교육을 위해서였다. 금시당과 함께 밀양강 굽은 허리를 내려다보는 백곡재는 1869년 들어선 건물이다.

◇가장 정자다운 반계정

월연대, 오연정, 금시당·백곡재는 정자가 아니다. 밀양의 이런저런 명문 집안에서 경영한 별장들이다. 규모부터 정자처럼 한두 칸이 아니라 예사로 대여섯 칸에 이른다.

또 한 채로 그치지 않고 너덧 채가 대부분이다. 앞서 살펴본 함안·창녕·합천 지역과는 많이 다르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밀양 풍속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한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이다. 밀양강 덕분에 옛날부터 들판이 너르고 소출이 많은 때문이지 싶다.

반면 단장천 상류에 있는 반계정(盤溪亭)은 소박하고 조촐하다. 이숙(1720∼1807)이 지었는데 역시 여주 이씨다. 반계정은 지은 취지부터 정자에 걸맞다. 이숙은 정자를 지은 다음 이렇게 읊었다.

"10년을 경영하여 작은 집을 이루고/ 난간에 기대어 낚싯대를 내리니 석양이 되었구나." 자연과 더불어 살리라는 생각이 오롯하다. 1775년 지었다고 알려졌지만 들머리 바위벽에는 '을사 4월 일/ 주 이숙(乙巳 四月 日/ 主 李潚)'이라 새겨져 있다. 이숙 생전에 을사년은 1785년이다. 두루 꿰맞추면 1775년 짓기 시작해 10년 만인 1785년 완공한 것이 된다.

자리 잡은 품새도 영판 정자다. 행랑채와 본채, 정사(精舍) 셋인데 본채를 받치는 축대가 인공이 아니라 자연이다. 뒷산에서 앞쪽 개울로 이어지는 반석 위에 통째로 앉혔다. 담장도 두르기는 했으나 냇물을 바라보는 데 걸리지 않도록 높이를 낮추었다. 지금도 반계정에서는 마루에 앉은 채로 흐르는 물줄기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반계 자체가 반석 위를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이니까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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