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반장서 60년 옷장사로 집안살림 일군 억척 엄니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2살 때 국민학교 입학
전쟁 탓에 3년 만에 그만둬
18살때 부림면으로 시집
시동생 키우며 집안 살림도
남편과 함께 동양피복 운영

"내는 놀러도 못 댕깄다. 시집올 때까지 가본 데라고는 저으게 밑에 함안 대산 건너는 송도다리꺼정 한 번 가본 기 다거만. 울 집에서 어머이랑 맨날 천지로 목화씨 뽑고 물레 돌리는 게 일이었는기라. 학교도 다 못 댕기고."

1937년생 여든둘 차상남 엄니. 의령군 부림면 신반시장에서 남편 이성열(86) 씨와 옷가게 '동양피복'을 60 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상남 엄니 고향은 의령군 지정면 양동마을이다.

◇시집가기 전에는 온종일 물레로 실 잣고 베 짜고

"요서 쭈욱 가모는 지정면 양동이라카는 동네가 있어. 신반보다 더 골짝인기라. 거서 태어났어."

당시 양동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다들 야학교에 다녔다. 상남 엄니도 동무들을 따라 다녔다. 그러다가 마을에 학교가 생긴다고 했다. 상남 엄니가 10살이 넘어서였다.

▲ 의령군 부림면 신반시장 동양피복 차상남 엄니.

"국민학교 하나 지인 기. 우리가 마아 옷자락에다가 돌로 싸 가지고 축담이라 쌓은기라. 학생들이 전신에 돌로 마 이고 여다가 담을 쌓는기라. 그래 교실 한 개 맨들어 가지고 학교를 일바시가꼬 울들이 다닌기제."

마을에 학교가 생긴대서 동네 어른들은 돌아가며 손을 보탰다. 상남 엄니나 여자애들은 치맛자락에 돌을 싸안고 옮겼다. 마을아이들이 이고 지고 옮긴 돌은 주춧돌이 되고 학교 담벼락이 됐다. 학교라 해봤자 지금처럼 교실, 강당, 운동장 등이 갖춰진 학교가 아니었다. 담 쌓아 겨우 칸 질러 만든 것일 뿐이었다.

학교가 완성되고 상남 엄니는 1학년이 됐다. 상남 엄니 열두 살이었다.

"그전에는 머 국민학교가 없어 가지고. 우리가 열두 살인가 그때 일학년 들어갔고. 한 집에 일학년이 서이도 대이고 다서이도 대이고 그런기라. 열 살, 열다섯 살, 일곱 살 막 그리 시작했어. 국민학교도 이런 머 얄궂이 가마이 피가꼬 우우 앉아서 공부하고."

교실 바닥이라는 게, 가마니를 여러 장 바닥에 펼쳐놓은 정도. 그 위에 올망졸망한 수십 명 아이들이 다닥다닥 앉아서 공부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상남 엄니 3학년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양동마을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내가 12살에 1학년으로 입학했으니 육이오 사변일 때 열다섯 살 묵었지. 하모 고때 터짔삤다. 학교 댕기다가 고마 육이오가 나 학교도 몬 가고 쪼깨 다니다가 막실한기라. 그 질로 끝냈삔기라."

전쟁통에 학교는 문을 닫았고, 휴전이 되자 곧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상남 엄니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른들은 나이 꽉 찬 딸아이가 학교를 더 다닐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제 시집갈 준비나 착실히 하며 어머니한테 일이나 배우라고 했다.

당시 양동마을에는 여름이면 집에서 삼베를 짰다. 모심기가 끝나면 대마줄기를 수확해서 삼을 삼았다. 이때도 상남 엄니는 물레를 돌려 삼실을 잣고 베틀에다 삼베를 짰다.

"(학교를) 끝내 가지고 멩이나 잣고. 멩 잡고 또 삼이라고 있었어 삼베. 그거 밭에 심어 가지고 여름에 이때 지금 삼는다. 삼아 가지고 그걸 전신에 잣아고 째고 베틀로 낳아 가아 베를 안 짜나."

가을이면 목화 수확을 했다. 그때면 온 동네가 솜을 타고 실을 잣고 베를 짜서 돈을 샀다.

"밭에다가 심어 가지고 쎄에기라고 요런 기계에다가 넣어 가지고 요래요래 돌리 가지고 앗아 가지고 씨로 빼고, 그래가아 밤으로 이슬로 맞차가꼬. 목화를 갖다가 마당에 딱 펴 놔…."

목화씨 빼는 기계를 '씨아'라 했다. 상남 엄니는 '쎄에기'라고 했다. 목화송이를 씨아에 넣고 돌리면 뒤로는 씨가 떨어지고 앞으로는 솜이 술술 빠져나온다. 씨를 뺀 목화솜을 밤마다 마당에 펼쳐놓고 이슬을 맞혔다. 그렇게 이슬을 맞혀 녹인 솜은 활을 이용해 솜 타기를 한 후, 말대로 비벼 말아서 고치말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물레질을 해서 실을 잣는다. 무명실이다. 무명 한 필을 짜려면 여러 날을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고, 무명옷 한 벌을 지으려면 또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상남 엄니는 시집올 때까지 그 일을 했다. 아들 둘, 딸 셋 중에 막내로 자라 밥을 하거나 밭일을 하지는 않았다. 집안 농사일은 오빠들 차지였고, 살림은 언니들 차지였다. 시집오기 전까지 함부로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엄했고, 여자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면 시집도 못 간다고 말했다.

◇시동생 키우며 시집살이…옷 장사로 살림 일궈

열여덟 살에 중매로 네 살 더 많은 신랑 이성열 씨와 혼인했다.

"나는 동짓달 스무여드렛날 결혼을 해 가지고 일 년 동안 친정에 있다가 그 다음해 12월 초이튿날 시집에 왔어요. 옛날에는 묵히는기라. 묵하가 시집온다카는기라. 집에서 살림 배우고, 그 사이 신랑이 한두어 번 왔을라나. 그래가꼬 일 년 있다가 시집을 이리 오는기라."

예전에는 혼인식을 하고도 각시가 1년 동안 친정에 있었다. 바로 시집으로 가지는 않았다. '신행'이라 했다. 1년 뒤, 부림면 감암리 시집으로 갔더니 삼대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래 가마매로 시집오니까 쪼껜헌 집에 방이 시 개라. 한 방에는 시숙은 군에 가삐고 큰동시가 아들 하나 데꼬 있고. 또 우리 할매할배 한 방 차지해 가아 있고. 우리 시어머이 시아바이 한 방 차지하고 있고. 할 수 없이 우리 어머이하고 내하고 신랑이 한데 자고. 우리 시아바이는 딴 데 가서 주무시는기라."

▲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는 몰라도 남편 이성열 씨와 젊은 날의 추억 사진.

방이 세 칸뿐인 작은 집이었다. 3대 4가구가 한 집에 살아야 하니 방이 모자랐다. 신혼인 상남 엄니 부부도 시어머니와 한 방을 써야 했다. 거기에다 시어머니가 나이 오십에 낳은 막둥이 시동생이 이제 태어난 지 몇 달 채 되지 않았다.

"시동상을 갖다가 오십에 우리 시어마이가 낳았는기라. 우리 어머니가 젖이 없어가지고 밥물로…미음도 아이고… 밥을 하면은 보골보골 끓으마 물로 인자 한그슥 뜨는기라. 아침에 하믄 점슴, 저녁까지 미야 되고. 저녁에 하믄 떠놨다가 밤에 하고 내일 아침꺼정 멕이야 되고."

밤에 자다가도 어린 시동생에게 밥물을 데워 먹이려면 화롯불이 있어야 했다. 행여 화롯불이 꺼질까 봐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신랑도 서먹하고 시집 식구들도 서먹한데, 갓 시집온 새댁은 시집 살림하랴, 시동생 돌보랴 다리쉼 한 번 할 여가가 없었다.

몇 년 후 첫 아이를 낳고는 남편을 따라 인근 오일장을 다녔다. 화장품 장사에 이어 남편이 옷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한창 많이 팔릴 때는예, 장에서 (돈을) 가릴 여게도 없어가꼬 봉다리에다 고마 쑤셔넣은기라. 그래가꼬 집에 와서 저녁 묵고 막 세아리. 고래 가꼬 한 십 년 잘 벌있는데…. 그때만 해도 돈을 벌있은게 인자 가게도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많이 샀단 말이야. 벌이 가지고."

상남 엄니네 동양피복은 신반시장 안 큰길에 있다. 그 당시 자리 잡은 곳이다. 목이 좋은 곳이라 장사가 잘됐다. 특히 추석, 설날이면 대목이었다.

"그때는 애들 옷이 잘 팔맀제. 어른들이 저그 옷은 못 사입어도 아이들 맹절 옷은 샀으니께네. 그러다가 교복 자율화되고 나니까 더 잘됐어. 하이고, 돈을 막 이리 버는가 싶었던기라."

그렇게 60여 년 옷 장사로 집안 살림을 다 일궜다. 사는 게 힘들어 그동안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었지만 상남 엄니는 지금까지 남편과 크게 싸운 일이 없다. 언젠가 채소밭에 전 재산을 투자해 억대의 돈을 잃었을 때도, 그저 남편이 무탈한 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후에 다시 옷 장사로 살림을 일궜고 이제는 자식들 다 잘되고 크게 걱정 없는 노년이다.

"아이고 인자 서로 몸만 건강하면은 되는기라. 자식들 짐 안 지우고."

/글·사진 시민기자 권영란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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