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 돼버린 대표 상징물
당시 시위대열 합류지점
기념해 1962년 7월 건립
학생뿐인 인물상 고증 오류
버스주차 불가·화장실 민망

1960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불법 선거를 거부한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당원과 학생·시민 등 1000여 명이 "협잡 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민주당 마산시당사에서 출발해 남성동파출소, 부림시장 등 시내 중심가를 돌아 오후 4시 30분께 출발지로 돌아왔다. 이때 경찰이 급습해 민주당 간부 6명을 폭행한 후 연행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남성동파출소로 몰려갔다. 그러자 파출소 앞에서 대기하던 소방차가 이들을 향해 물대포를 쐈다. 사람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대항했지만 전열을 정비한 경찰, 각목을 휘두르며 기습 공격한 '반공청년단'에 의해 시위 대열이 흐트러져 저녁 7시 개표 장소인 마산시청 앞에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이날 시위 소문을 듣고 민주당 마산시당사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이 남성동파출소로 향했다. 창동사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저녁 7시께였다. 이들은 파출소와 파출소 옆 자유당 마산시당사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경찰과 일진일퇴 공방이 이어졌다.

김영만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가 3·15의거탑 부조를 가리키며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류민기 기자

◇경찰 어두워지자 실탄 발사 = 사람들은 개표 장소인 마산시청으로 향했다. 남성동파출소, 북마산, 신포동 방향에서 온 사람들이 합류했다. 무학국민학교에 이르는 100여m 거리에 인파가 가득했다.

시위대가 시청을 에워싼 경찰과 부딪혔다. 이곳에서도 물대포를 쏘고 돌멩이를 던지는 등 공방이 이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대응했다. 밤 8시. 소방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돌진했다. 사람들은 돌멩이를 던졌고, 기사가 운전대를 놓쳐 소방차는 무학국민학교 앞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시내가 암흑으로 변했다.

'탕' '탕' '탕'. 경찰이 실탄을 쏘기 시작했다. 대오 앞줄에 있던 학생이 쓰러지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 흩어졌다.

◇버스 주차공간, 인물상·부조 보완해야 =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84-325. '3·15의거탑'이 있는 이곳은 1960년 3월 15일 남성동파출소에서 마산시청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합류한 지점이었다. 3·15의거탑은 1962년 7월 10일 세워졌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9월 21일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영만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는 '주차장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김 대표는 "타 지역 시의회 등에서 대형버스를 타고 올 경우 주차할 곳이 없다.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곳인데 차를 세울 수 없어 그냥 지나친 경우도 있다"며 "학생 등 탐방객들이 개별적으로 오더라도 차를 세워놓을 곳이 없다. 역사 현장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당시 상황을 실감할 수가 없다. 주차공간 확보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인물상·부조 오류도 지적했다. 탑 앞에 남녀 고교생 2명과 대학생 1명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는데 이들만으로는 당시 현장을 오롯이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 상임대표는 "인물상을 보면 모두 학생이다. 3·15의거 주역이 학생뿐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며 "당시 학생과 함께 하층 노동자·홍등가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 또한 동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부조에 표현된 인물들 모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의거는 3월에 일어났는데 복장은 8월"이라며 "부조를 만들 때 고증을 잘못했다. 그만큼 현장성이 떨어지는데 창원시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탑 뒤편에 있는 화장실도 문제였다. 간이화장실을 설치해놓았는데 소변만 볼 수 있다. 세면대가 없어 손을 씻지도 못한다. 김 대표는 "역사 현장으로서 그 중요성을 따졌을 때 격이 안 맞다. 사람들한테 이곳에 화장실이 있다고 안내하기 민망할 정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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