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끈 '씨앗'
죽음 각오한 그 독립운동 기억해야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근원이다. 임시정부는 그에 앞서 3월 1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혁명의 결과로 태어났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모태 격인 3·1혁명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로 만세시위의 깃발이 올랐다. 만약 그때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3·1혁명 거사는 제대로 성사되고 또 확산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33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릴 무렵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는 식민지배에서 신음하던 약소국들에는 마치 복음과도 같았다. 이 소식을 접한 국내외 민족진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집단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무단통치가 시작되면서 국내에는 여타 항일단체는 씨가 말라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이 종교인들로만 구성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의 초기 단계인 1월 20일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운동 3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정했다. 대중화를 위해 구한국 정부의 대신 등 명망 있는 원로들을 영입하기로 하였다. 윤용구, 한규설, 박영효, 윤치호 등을 접촉하였는데 하나같이 때가 좋지 않다거나 병을 핑계로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의 신성한 제전에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는 말로 자위하고는 자신들이 앞장서기로 했다.

의암 손병희가 이끈 천도교는 교세와 재정이 탄탄했다. 그의 주변에는 권동진, 이종일, 오세창, 최린 등 재사(才士)들도 많았다. 손병희는 당시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높던 평북 정주의 남강 이승훈을 통해 연대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교리 문제로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조선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천도교 15인, 불교 2인(백용성, 한용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유림과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촉박한 데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3·1독립선언에 연루돼 재판을 받은 사람은 총 48인이다. 33인 이외에도 학생대표들, 후사를 위해서 빠진 이상재, 함태영 등도 포함돼 있었다.

총독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독립선언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실제로 총독부는 예심에서 민족대표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죽일 작정도 했다. 그러나 제2의 3·1혁명을 우려하여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을 적용하였다. 거사 직후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징역 2~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선언서에 이름 석 자 올린 '죗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 석 자는 낯설다. 천도교 산하 출판사 보성사의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책임을 맡았던 이종일이 해방 후에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감리교 목사 출신의 신석구가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정권과 맞서다 평양 교외 강변에서 총살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박동완은 3·1혁명 이후 한복을 입었으나 바지에 대님을 매지 않았으며, 평소 시계를 30분 늦춰 놓았다. 일제가 정한 표준시각에 맞춰 살지 않겠다는 신념의 표시였다.

정운현.jpg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정춘수, 최린, 박희도 등 3인은 일제 말기에 변절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30인은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만약 33인이 서명하지 않았다면 3·1독립선언서는 한낱 유인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가 민족대표 33인을 기억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