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이변·가격 하락에 망가지는 농심
자연 순리에 따라 사는 낙으로 이겨내

"예슬아, 일하다가 여기가 살짝 찢어졌는데 누벼줄 수 있나?" 나무실 마을에 사는 인화 삼촌이 찢어진 바지를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바느질을 오래 하다 보니 간단하게 옷 고치는 일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처럼 비가 자꾸 와서 밭에 못 가는 날에는 뭐 하면서 지내요? 시골에서 심심하지 않아요?"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하루에 밥해 먹는 것만 해도 얼마나 일이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인화 삼촌이 맡기고 간 바지도 누벼야 하고, 여동생 치마도 고쳐 주어야 하고, 공책에 끄적거려 놓았던 글도 풀어써야 하고, 그리다가 덮어 놓았던 그림도 마저 그려야 한다. 식구들이 좋아하는 빵도 구워야 하고, 보고 싶었던 책이랑 영화도 봐야 하고, 저녁에는 동생이랑 9월에 초대받은 공연 연습도 해야 하고…….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줄줄이 땅콩처럼 많다.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 하는 성격이라 찬찬히 하다 보면 심심할 틈이 별로 없다. 문득 '내 하루를 채워 주는 일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내 삶을 지켜 주고 있었다.

한창 작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야 할 때에 비가 오지 않아서 애태우고, 열매가 영글어야 할 때는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쩔쩔맸다. 며칠째 쏟아지는 비 때문에 논이 넘치고, 벼가 쓰러지고, 배추밭까지 물에 잠겼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렇다 보니 농부들에게서 "이래가 우찌 농사짓고 살겠노" 하는 말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폭염과 가뭄으로 픽픽 쓰러지는 작물들을 보면서 마음이 지쳐있는데, 집중호우까지 견뎌야 한다는 건 너무 모진 일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하늘이 내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래도 "우르릉 우르르릉 와아앙!" 하는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글로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풀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고치고, 만들면서 비 오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내 손을 거쳐 다시 입을 수 있게 된 옷, 점심때 끓인 된장국, 비 오는 창가를 내다보며 쓴 시들이 모여 내 삶에 의미를 더한다. 먹구름이 몰려가는 하늘을 멍하게 쳐다보아야만 했다면, 빗물이 눈물이 되어 왈칵 쏟아져버렸을지 모른다.

한창 가뭄과 폭염이 심했던 때, 잎이 녹아내려 쓰러져버린 생강밭 앞에서 봄날(서정홍 농부시인)샘에게 물어보았다. "봄날샘은 농사를 그만 짓고 싶었던 때 없었어요?" 하고 말이다. 밭에서 늘 힘차고, 즐거워 보이는 봄날샘도 농사를 그만 짓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까? 그런데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왜 없어. 있었지" 하셨다. 그 첫 마디를 듣자마자 왜 그렇게 안심이 되던지.

"몸은 고단하고, 지구온난화로 날이 갈수록 농사지으며 살기가 만만찮아. 그리고 농사 잘 지어도 제값 못 받는 때가 더 많잖아.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농사일 그만두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지.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어. 아무리 삶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농부보다 자유로운 사람은 없잖아. 어느 누구한테 간섭받지 않고, 자연 순리에 따라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가꾸다 보면 설렘과 기쁨이 저절로 막 생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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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도 흙과 바람과 별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연이 그리워지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계속 농부로 사는가보다. 오늘 아침에 인화 삼촌이 맡겨 놓은 찢어진 바지를 고쳤다. "삼촌, 바지 고쳐놨어요." 문자를 보내니 "시간 날 때 찾으러 가마. 고맙다." 하는 답장이 왔다. 삼촌 바지를 고치면서 내 마음도 함께 꿰매어 고쳤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다시 씩씩하게 밭에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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