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오패(五覇) 중 하나였던 진(晉)나라는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에 의해 분할된다. 전국시대가 열린 시점이다. 그런데 한, 위, 조 세 가문이 진나라를 나눠 가지기 전 진나라 실권은 지(智)씨 가문이 쥐고 있었다. 강성했던 지씨는 왜 패망했을까? 지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던 한, 위, 조 삼성(三姓)은 어떻게 제후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지씨 가문의 후계자를 선발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지씨 가문 영도자 지선자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아들 순요를 총애했다. 문중 사람들을 모아 그런 뜻을 전하자 일족인 지과가 다른 아들인 순소를 택하는 게 옳다며 이 결정에 반대했다. 지과는 이렇게 말했다. "순요는 남보다 뛰어난 점이 다섯 가지가 있고,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장점이 월등히 많은 아들을 포기하라? 얼핏 보면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지과가 한 말을 풀어보면 이렇다. 순요는 아름다운 구레나룻을 가지고 있었고, 활쏘기와 수레 몰기에 능했으며 이런저런 재주에다 훌륭한 문장과 변론을 갖췄음은 물론, 굳세고 용감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스펙이다. 아름다운 구레나룻은 외모가 뛰어나다는 걸 강조하는 당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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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북송 시대의 학자 사마광.

그렇다면 이토록 훌륭한 인재를 지과는 왜 반대했을까? 어진 마음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과는 후계자가 지씨 가문 대표가 되면 진나라 정권을 움직이는 막중한 권력을 갖게 되는데, 남을 능멸하며 어질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이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순요는 지선자가 안배한 대로 후계자가 된다. 그런 후 교만에 빠져 충언을 무시한 채 한, 위, 조 세 가문을 겁박해 땅을 뺏는 행위를 거듭하다 협공을 받아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자치통감> 저자 사마광은 '재능과 덕성'이란 말로 이 사건을 평론한다. "지백(智伯)지씨 가문 지도자, 여기서는 순요이 멸망한 것은 재능이 덕성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재능은 덕성과 다른데도 세속에서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뭉뚱그려 현명하다고만 한다. 대저 총명하고 강건한 능력을 재능이라 하고, 정직하고 조화로운 품성을 덕성이라고 한다. 덕성이란 재능을 이끄는 통솔자다."

사마광은 이어 성인, 우인, 군자, 소인, 이 넷을 분별하고 풀이하는 인물론을 펼친다. "재능과 덕성을 모두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재능과 덕성이 전부 없는 사람을 우인(愚人)이라 한다. 덕성이 재능보다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 부르고, 재능이 덕성보다 뛰어난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칭한다. 만약 성인과 군자를 얻어 함께 하지 못할 때에는 소인을 얻기보다 차라리 우인을 얻는 것이 더 낫다. 왜 그런고 하니 군자는 재능을 가지고 선을 행하지만 소인은 재능을 가지고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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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광의 <자치통감>.

<자치통감>이 핵심으로 파악한 것은 무슨 일이든 소인이 칼자루를 쥐어서는 안 된다는 의론(議論)이다. 인간군상(人間群像)을 마치 '사상의학'으로 재단하는 듯한 논리이지만, 드라마틱했던 역사적 사건을 정치윤리적 시각으로 분석해 흥망을 논한 점은 경청할 만하다.

이런 관점으로 20세기를 '광기 어린 폭력의 세기'로 몰아넣은 히틀러를 들여다보자. 많은 이들은 히틀러를 그저 세계대전을 초래한 잔인한 정치가로 기억하지만 재능이란 측면에서 볼 때 히틀러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둔 정치가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 총리가 된 1933년에 독일에는 6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있었다. 이 실업자들은 불과 3년 만인 1936년에 모조리 사라졌다. 완전고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아우성치던 곤궁과 대량빈곤이 사라지고 소박하나마 편안한 복지상태가 실현되었다. 1차 대전 패전에 따른 경제난으로 희망을 찾지 못하던 국민들이 자신감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다. 사가(史家)들이 더 놀라워하는 것은 불황 상태에서 경제적 번영으로 넘어가는 여정에서 인플레이션 없이 임금과 물가가 완전히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종종 히틀러가 이끈 나치제국이 경제기적을 이룬 것은 군비 확장 덕분이라고 말한다. 일자리 창출이 완전히 또는 본질적으로 군비 확장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나치제국이 장갑차와 대포, 비행기를 대량생산함으로써 수십만 명의 금속 노동자들에게 임금과 빵을 공급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총리가 된 히틀러 앞에는 이들 외에도 500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정상적인 민간 기업체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히틀러는 사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경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손에 쥐자 경제가 핵심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긴축과 통화안정 대신 재정 팽창을 선택했다. 본능적 재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목이다.

<히틀러 평전>의 저자 요아힘 페스트는 "1938년 말 히틀러가 암살로 쓰러졌다면 그를 가장 위대한 독일 정치가들 중 한 명, 혹은 독일 역사를 완성한 사람이었다고 부르기를 망설이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공격적인 연설과 <나의 투쟁>, 반유대주의, 세계지배 계획 등은 어쩌면 초기 공상으로 잊혀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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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를 ‘광기 어린 폭력의 세기’로 몰아넣은 나치제국의 아돌프 히틀러.

이 위대한(?) 정치가는 지금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이 맹수 같은 사나이가 저지른 폭력은-물론 구조적 요인을 무시할 순 없지만-지금도 인류가 과연 정상적인 생존을 영위할 능력을 지닌 동물종(動物種)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유가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어짊(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마광의 표현대로라면 '정직하고 조화로운 품성'과는 아예 담을 쌓은 인물이라고 하겠다.

18~19세기 프랑스 정치가 딸레랑은 <자치통감>이 진나라 지백에게 들이댔던 잣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에 이어 나폴레옹 집권기, 왕정복고기, 이후 루이 필립 정권기라는 전무후무한 격변기 속에서도 계속 고위 외교직을 맡아 유럽을 종횡무진한 사람이다.

국내외 정세 파악에 뛰어난 데다, 외교적 기량도 탁월해 나폴레옹 이후 유럽에 새 정치 질서가 자리 잡을 때 모국 프랑스가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하는가 하면, 패전국임에도 질서 재편을 주도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이는 엄청난 성과여서 민족주의 세기로 불렸던 19세기에 딸레랑은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국제 외교사(外交史)에서 레전드로 꼽히는 딸레랑은 그러나 '탐욕과 배신'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웠던가 하면 프랑스 혁명 말기에 미국 외교사절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미국 관계가 큰 손상을 입을 정도였다. 딸레랑을 높이 평가하고 중용했던 나폴레옹이 후에 그를 멀리하게 된 것도 지나친 '뇌물 밝힘증' 때문이었다.

격변기 속에서 자신을 중용한 정부를 빠짐없이 배신한 사실은 탐욕보다 더 큰 낙인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혁명 후 생긴 '국민제헌의회'에서 일할 때는 정치적 반대자인 국왕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나폴레옹을 수행해간 회의에서는 적국인 러시아 황제와 비밀리에 만나 나폴레옹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물론 딸레랑은 이런 행위가 '조국 프랑스를 위한 길'이었다고 변명하지만, 그럼에도 직접 살을 부대끼는 동지들을 배신하고 어떤 죄책감도 없이 적과 서슴없이 내통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지와 음지가 비슷한 무게로 공존하는 딸레랑은 '재능과 덕성'이란 저울로 달 경우 어느 쪽에 기울어질까? 딸레랑이 지닌 역사적 광휘는 이런 판단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사마광은 명료한 어조로 밝혔지만 그래도 재능과 덕성을 또렷하게 선을 그어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능이란 당대에 누구나 다 알아차리지만, 덕성은 대체로 관 뚜껑이 덮인 뒤에야 드러난다는 옛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그렇지만 지백이나 히틀러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프랑스 역사가 앙드레 모로가 탁월한 재능으로 미국 건국을 이끈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을 묘사한 글을 보자. 모로는 먼저 워싱턴을 이렇게 평한다. "워싱턴은 지도자로서 무엇보다 필요한 관대한 도량, 고결한 인격을 갖췄고 증오심이나 편협한 감정 혹은 허영심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역경에 처해도 비관하지 않았고 성공해도 우쭐대는 일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었기에 타인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랭클린에 대해서는 "유머와 기지에 뛰어났고 정적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항상 공정한 타협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토마스 칼라일은 그를 싫어했으면서도 그를 '양키의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격찬했다. 덕성이란 단어가 연상되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미풍(美風)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지 않은가?

조선시대로 시선을 돌려보자. 한음 이덕형은 과거 합격 후 32세에 대사헌, 34세에 이조판서, 38세에 우의정을 지닌 조선 선비다. 출사(出仕)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당대에 그는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세속적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한음에게 재능과 덕성은 어떻게 연결돼 있었을까? 그를 기리는 신도비에 적힌 글이다.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음은 알지 못했다(知有國而 不知有身)." 국란인 임진왜란을 맞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동분서주한 그를 평가한 말이다. 멸사봉공! 이만한 찬사가 또 있을까?

정조 시절 10년 독상(獨相)으로 유명한 번암 채제공은 유교사회에 살던 벼슬아치였지만 매점매석을 보장하던 '도고법(都賈法)'을 폐지한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세도에 굴하지 않고 공정한 자세로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진 몇 안 되는 조선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를 위해 이런 찬가를 남겼다. "그 웅위하고도 걸특한 기개는 천 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의 기상이었지만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은 조금도 마음속에 두지 않았네. 군자답도다. 이 어른이여! 이런 분이 아니면 백성들이 그 누구를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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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레랑이 일했던 프랑스 국민제헌의회. 혁명 직전에 전국 삼부회로부터 이탈한 제3신분이 중심이 되어 만든 의회로 헌법 제정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테니스 코트 서약’으로 결의했다.

조선 선비들이 객관적인 비평에 약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글이 회자되고, 후인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번암의 덕성이 엄청난 무게감을 지녔다는 말이다.

한음과 번암의 반대편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바로 소인이다. 사마광은 재능이 덕성을 앞서는, 그래서 위험한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불렀는데 소인이란 말에 담긴 동양적 뉘앙스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예컨대 히틀러를 소인이라고 못 박기는 조금 어색하다.

중국 문화평론가 위치우이는 그래서 재능과 덕성을 단순히 견주지 않고 소인이 가진 디테일을 잘 살피고 있다. 위치우이가 파악한 '위험한 소인'은 타고난 재능을 무기 삼아 첫째 번거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둘째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먼저 따진 다음에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니, 그들을 쓰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견(忠犬)이 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친박이라는 간판 아래 매명(賣名)을 떨친 이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몇몇은 밤낮없이 뛰는 성실함에다 비상한 머리까지 갖춰 언필칭 실세로 군림했다. 일일이 열거하긴 힘들지만 개혁 입법을 가로막고, 정권 옹위에 온 힘을 쏟던 이들에게 분노한 국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파리 텍사스>로 유명한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사람들은 갈수록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고, 믿는 것을 사게 된다. 영화에서 본 것들을 사용하고 운전하고 입고 먹고 산다"고 했다. 영화가 지닌 문화 지배력을 설명하고자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우리 현실에 대입시키면 소름 끼치는(?) 상황이 떠오른다. 오피니언 리더나 정치인, 기업가, 혹은 관료 중에 위치우이가 지목하는 소인들이 판을 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에게 미혹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분야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 삼국시대 때 위나라를 건국한 조조는 사람을 쓸 때 재능을 구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먼저 따졌다. 아무리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유능하면 발탁하고, 명성이 천하를 뒤덮어도 능력이 따르지 않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같은 '유재시용(唯才是用)' 원칙을 고수한 덕에 그는 확실히 많은 인재를 모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위나라는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4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45년이란 것도 공식적인 기간이지, 실제로 위나라가 권력을 행사한 기간은 34년에 지나지 않는다. 인재로 무장한 위나라가 이토록 빨리 주저앉은 이유는 뭘까?

대만 사학자 라오간은 조조가 능력을 중시하는 인재 등용책으로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이 때문에 진심으로 국가를 보위하려는 선비가 적어 종국에는 나라가 망했다고 진단한다. 조정에 가득한 '능력 있는 인재들'이 대부분 재능을 토대로 개인적인 영달만 꾀했기에 권력이 한번 사마씨(司馬氏)에게 쏠리자 왕조 자체가 주저앉고 만 것이다.

이에 앞서 위나라 중신 두서(杜恕)는 재능 일변도로 흐르는 사회 풍조를 경계한 바 있다. "요즘 유학자들은 상앙과 한비를 스승으로 삼고 법가 학설을 배워서, 유가 학설은 실제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않아 세상에 널리 쓰이지 못한다고 앞다퉈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풍속 중에서 가장 심한 폐단으로 국가를 창업한 사람이라면 삼가야 한다."

무슨 말일까? 거칠게 말하면 법가 학설은 재능에, 유가 학설은 덕성에 비유할 수 있다. 덕성을 도외시하고 재능만 챙길 경우 조직이든 국가든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더듬어보면 쥐꼬리만 한 재능도 없이 공리공론만 일삼는 '덕성 숭배자들'을 종종 만난다. 이럴 땐 '유재시용'이 절실한 덕목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지만 사마광이나 두서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이게 아니다. 재능은 필요하되 반드시 덕성이 이를 인도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은 대부분 재주로 무장한 '영혼 없는 쓰레기'다. 그들은 덕성이 무엇인지 알기는 아는 걸까?

참고도서

- 요아힘 C. 페스트 지음/안인희 옮김, <히틀러 평전>, 푸른 숲

- 구주모, <고전과 함께 하는 수필 삼국지>, 채륜

- 사마광 지음/권중달 옮김, <자치통감>, 도서출판 삼화

- 장펑 지음/김영문 옮김, <자치통감을 읽다>, 378출판사

- 앙드레 모로 지음/신용석 옮김, <미국사>, 김영사

- 박석무, <조선의 의인들>, 한길사

- 위치우이 지음/유소용·심규호 옮김, <천년의 정원>, 미래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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