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가고파>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대부분 노산 이은상의 독재부역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독재부역 사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서 노산의 삶에서 유독 좋지 않은 부분만을 강조한다면서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분은 처음 들을 때에는 사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두둔을 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무조건 편들고 싶어 한다. 한번 마음을 뺏기고 나면 합리적인 판단이 쉽지 않다.

무리한 시설투자로 경영난에 봉착한 청구대

야청(也靑) 최해청(崔海淸·1905~1977년)은 해방 이후 시국을 걱정하는 모임인 삭망회(朔望會)를 조직하고 대구시보사의 독립운동국장으로 있으면서 '해방 기운은 식어들고 일제 잔재가 고개를 든다'고 생각하면서 독립운동의 생활화를 위해 노력하며 대중강연을 하다가 1950년 4월 청구대학을 설립하였다. 청구대학은 가난해서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는 근로자를 위한 야간대학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설립자인 최해청은 재단 이사 겸 학장으로 취임하고 재단이사장은 전기수를 추대했다. 1961년에는 청구공전, 청구중, 고등학교까지 설립하여 명실상부한 학교재단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대구대학은 1947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1884~1970년)이 설립한 학교이다. 최준은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상해임시정부에 거액의 자금을 기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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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 중앙도서관에 걸려있는 낙동강천리도.

5·16 쿠데타 이후 두 대학은 위기에 봉착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부실대학을 정리하고 있었으며 청구대는 1961년부터 무리한 시설투자로 경영난에 봉착하였다가 경리직원 비리 사건으로 결국 최해청이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이어서 신축공사 현장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전대미문의 이 사고로 10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때부터 설립자를 배신한 학교재단 이사(理事)들, 교수들, 노산 이은상 등이 등장하고 청와대에 진상 교섭이 벌어진다. 대학 핵심관계자는 자신들이 사법처리를 당할 처지에 몰리자 청구대학을 사죄의 뜻에서 군사정권에 바치고 처벌을 면해보기로 계획했다. 물론 이들은 설립자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결국 청구대학을 권력자에게 헌납하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설립자 야청에게 시종일관 조언과 위로를 아끼지 않고, 교수들 앞에서 관권(官權)에 의지할 발상(發想)을 의연하게 질타(叱咤)한 사람이 있었는데, 국문학자인 도남 조윤제(趙潤濟) 박사(博士)였다. "진짜 경상도 사나이"라고 야청은 일기(日記)에 적고 있다. 그는 대학이 안 되면 공전(工專)이라도 살려서 잘해보자고 하였다. 그는 드물게 소신 있는 교수였다. 두 차례나 대학에서 해직된 도남 조윤제는 회갑 다음 해인 1965년 대구 청구대학에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7월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재경 교수단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의장단의 대표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자 9월 말에 문교부로부터 정치 교수로 지목되어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세 번째로 해직된 지 2년 만에 다시 청구대학에 복직하였다. 1965년 62세의 나이로 청구대학에 처음 왔을 때 자기보다 5살 적은 최해태 교수에게 첫 대면에서 불문곡직하고 "내 자네한테 말 놓네"라고 했다고 한다. 총장의 동생인 최해태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노산 이은상이 52살일 때, 자신이 46살이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세련된 매너로 깎듯이 경어를 썼는데 도남은 영 달랐다. 대구대와 통합되어 출범한 영남대학교에서 71살인 1974년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영남대학교는 이은상과 이후락의 작품

결국은 야청을 '생매장'하고 난 후 청구대학(靑丘大學)의 구 이사들은 이후락 씨가 약속한 보상금(報償金)을 못 받아 노산에게 독촉하기까지 하는 신세가 되었다. 1997년에 발간된 <영남대학교 50년사>와 영남대학교 교수회가 발간한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상화 백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최해태 학장과 나(심재완 청구대 교수, 도서관장)는 우연히 일치된 묘안을 생각해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맡아달라고 간청하면 맡아주지 않을까라는 안이 나왔다. …… 이 일을 교섭할 사람은 이은상(청구대 국문학과 교수)이 적임이니 부탁하자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제안을 들은 이은상은 한 달이 지난 후, 학장실에서 만나니 "며칠 전 광주에서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났어요. 취지를 잘 설명하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부탁했는데 잘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다시 한 달 후 이은상은 청와대 면담 이야기를 학장실에서 학장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은상은 "대통령을 백 년 할 수 없는데 그만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설 생각은 해보았는가? 회사 사장이 될 수 없고, 외국에는 대학총장을 하는 일을 많이 보는데 가장 떳떳한 일 같은데 ……" 로 시작하여 "대구는 각하의 고향입니다. 그동안 각하는 무관으로 대통령을 했으니 문관으로도 이름이 남아야 할 것 아닙니까?"고 능란한 말솜씨로 두 시간 동안이나 우리가 제시한 이야기를 펼치니 대통령이 수긍하더라는 전언이 있고 난 뒤 ……

결국 1967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의 사람들인 이동령(공화당의원, 문경시멘트), 김성곤(공화당 재정위원장, 쌍용), 이후락(중앙정보부장), 이효상(전 국회의장), 백남억(전 공화당 의장) 등 공화당 중진들이 청구대학 이사로 추가되면서 청구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 헌납한 것이다. 당시 최해태는 설립자 최해청의 동생이었고 법대 학장으로 있다가 형의 후임으로 학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대구대학 역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이병철 회장의 삼성문화재단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병철이 대구대를 인수하면서 투입한 자금은 서울에서 대학을 하나 새로 설립할 수 있을 만큼 큰 것이었다. 교육, 문화의 서울 집중을 막고 지방에도 골고루 대학을 키워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대구는 삼성물산의 발상지이고 제일모직의 본 공장이 있어 삼성과는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노산은 5월부터 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6대 대통령에 연임된 박정희에게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강조했다. 박정희는 1967년 5월 3일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재대결한 신민당 윤보선 후보(40.9%)보다 훨씬 많은 51.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구대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 사실이 다음 날 주요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경쟁 관계에 있던 대구대는 위기를 느끼고 이병철 회장을 찾아갔다. 당시에 삼성은 성균관대학도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혁명정부 초기인 1961년부터 박정희의 경제개발 가정교사였다.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던 기업인 11명과 뒤늦게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등은 풀려나와 한국경제인협회를 만들었고 회장은 이병철이었다. 당시 삼성물산 사장이었다. 이병철 같은 기업인들은 박정희와 자주 만나면서 경제개발, 외자유치 정책수립 등을 하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혁명정부가 농업 우선의 균형성장 정책을 버리고 공업과 수출 중심의 불균형성장정책을 채택하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병철은 애초 울산에 세운 한국비료를 통하여 대구대를 지원할 계획이었으나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정부에 헌납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병철의 장남으로서 한국비료 건설에 핵심적으로 참여했던 이맹희는 '한비 밀수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서 정부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가운데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사카린 밀수사건이라는 선에서 검찰 수사가 종결되었다.결국 정부가 5·16장학회를 통해 대구대를 지원하겠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철은 사망 직전에 나온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당초 청구대학을 인수해서 종합대학으로 키울 계획을 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대학의 양도를 간청하기에 결국 넘겨주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청구대학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가 두 대학을 지원하면 어느 쪽도 제대로 발전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노산은 이 과정에서 두 대학을 통합하여 종합대학으로 만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통합을 추진하였다.

12월 15일, 같은 날에 반도호텔에서는 청구대학 이사회가, 삼성빌딩에서는 대구대학 이사회가 각각 열려서 두 대학의 합병을 공식 결의하였다. 그러고 나서 양쪽의 이사들이 반도호텔에 모여서 통합을 최종 의결하였다. 이 자리에는 문교부 법무관도 참석하였다 청와대 이후락 비서실장의 주도로 영남대 설립이사회가 열렸다. 이사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최측근 또는 정권실세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영남대학은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이후락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양 대학의 설립자로부터 학교를 빼앗아 박정희가 주인이 된 것이었다.

이 강제합병이 부당하다는 사설이 1967년 12월 23일 자 매일신문에 실리긴 했으나 당시 사설을 쓴 논설위원은 파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년에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은 죽을 때까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경북지부 공동대표를 맡아서 박 정권의 독재와 맞서 싸웠으며영남대학교를 장물(臟物) 학교라고 규정하였다. 결국 노산은 이 과정에서 신성구와 함께 중간다리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다. 노산은 양측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을 배신한 셈이다.

본래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과 노산의 관계는 친밀하였다. 독야청청(獨也靑靑)에서 야청을 따서 최해청에게 호를 지어줄 만큼 두 사람은 친하였다. 노산은 이미 광주에서 호남신문 복간을 위해 노력하다가 사장을 그만둔 후인 1954년 10월에 대구 청구대학으로 왔었다. 노산과 박정희의 관계도 긴밀하였다. 이미 노산은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을 썼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 박정희의 연두교서를 집필한 바 있으며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장을 맡았었기 때문에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영남대 교가는 이은상과 김동진의 작품

양 대학의 통합이 확정된 후에는 대학 교명이 뜨거운 감자였다. 청구대가 대구대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대구대 교수들은 교명 사수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때 이은상은 '영남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훌륭한 학자도 많이 배출해 추로지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특성을 계승해야 한다'며 학교 이름을 영남대학교로 지었다. '영남(嶺南)'이란 교명(校名)의 유래는 청구대학(靑丘大學)에서 열렸던 '영남의렬제(嶺南義烈祭)'라서 노산이 의견을 내었는데, <嶺南大學校五十年史>에는 이후락이 자기의 '사안(私案)'으로 제안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가곡 가고파를 합작한 이은상과 김동진은 영남대 교가도 함께 만들었다.

보라, 여기 신라의 옛 땅, 민족의 혼이 살아 뛰는 곳 / 금호강 기슭 달구벌 언덕 장엄하다 진리의 전당 / 어둠과 거짓 물리치려고 밝음과 참됨 가르치시네 / 너 슬기론 젊은 얼들아, 너 억센 젊은 힘들아 / 새 역사의 창조자 되라 겨레를 위해 인류를 위해 / 이 조국과 함께 크는 영남대학교 / 아 정의의 샘터여 학문의 등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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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한 영남대 교가.

통합된 영남대학교에서 노산은 1969년 3월까지 근무하였다. 노산이 퇴직한 1969년에 오랜 친구인 이선근 박사가 영남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청구대학 이사장 전기수의 4남인 전재용(성형외과 의사)은 2007년 6월 14일 서울 논현동 자신의 병원에서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영남대 이사장 및 이사 시절의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은상 전 영남대 교수가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보냈다는 3장짜리 친필 편지 사본을 공개하면서 "이씨가 이 전 실장에게 편지로 대학 강제편입 문제가 잘 해결되길 바란다는 부탁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경북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 중앙도서관에는 가로 24m, 세로 1m의 큰 그림이 걸려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영남대 개교 3주년을 맞이하여 기증한 선물이다. '낙동강천리도'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세 명의 작가에게 주문하여 1970년 3월 1일 제작하였다. 그림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유산 민경갑, 글은 노산 이은상, 글씨는 한국서예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일중 김충현이 썼다. 이들은 낙동강 1300리를 헬기를 타고 돌아보고 합작했다고 한다. 민경갑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250만 번 이상 붓을 잡고 그렸다고 한다. 청와대 접견실에 걸린 '장생'을 그린 작가이다.

신사임당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부는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를 중요한 목표로 내걸고 역사와 문화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문화와 국사 교육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용하였다. 어떤 분야보다도 중립성이 요구되어야 할 문화와 교육에 정치색이 더해졌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순신, 세종대왕, 신사임당과 같은 인물, 강화도와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적지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사적지 성역화 사업은 박정희의 개인적인 관심과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선별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쿠데타로 집권하였기 때문에 정권의 합법성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개인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반공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화가 갖는 역할을 중시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문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968년 7월 문화공보부를 발족하고 1972년 문화정책의 근간인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였다. 이어서 1973년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되고 제1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1978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였다.

1962년 10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특별지시로 강원도지사 이용이 강릉에 있는 오죽헌을 보수하고 같은 해 11월, 제1회 율곡제를 개최하였고, 이어 매년 계속하고 있다. 1963년에 오죽헌을 보물 제165호로 지정하였으며 1964년 강릉시청에서 율곡기념협회(회장 장성택)가 창립되고 강릉향교 안에 율곡의숙(栗谷義塾)을 설립하여 인가를 받았다. 1965년 10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오죽헌 경내에 율곡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였다. 이때 율곡기념사업회에서는 영정을 제작하였는데 사임당 영정은 몽룡실에, 율곡의 영정은 정조대왕 어제각(御製閣)에 각각 봉안하였다.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사임당의 동상은 세 개가 있다. 1970년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회장 장태화)가 제작하고 고려 원양어업 사장 이학수가 헌납하여 서울 사직공원에 세운 것이 있고, 1974년 강원도(도지사 박종성)가 강릉시 경포대 서쪽에 세운 것 그리고 1977년, 사임당 교육원 안에도 세워져 있다. 경포대 동상의 앞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신사임당 상'이라고 쓰여 있다. 이은상이 지은 사임당의 약력과 '사임당찬가'를 김충현의 글씨로 새겼다. 사임당교육원은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를 받아 1977년, 강원도 교육위원회에서 건축하였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62년 9월에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초판을 출간하였다. 1966년에 재판을 찍었고 1994년까지 무려 7판을 거듭하였다. 사임당 탄생 457주년 되는 1961년 10월에 노산이 쓴 초판 책의 머리말에서는 어진 어머니, 어버이에 효도한 여성, 시문에 능한 부인, 글씨 잘 쓰던 부인, 그림 잘 그리던 여류화가 등 각각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그 모든 여성은 한두 가지에만 능할 뿐인데 뛰어난 인격자이면서 덕이 높고 어진 어머니이면서 어버이에게 효녀이고 학문에 능하고 글씨, 그림을 잘 그리고 자수까지 능한 종합적인 모범부인은 사임당 신 씨 부인이라고 소개하였다. 이 책을 내는 데에 그림 감정은 소전(素) 손재형, 책 제목 글씨는 동교(東喬) 민태식, 사진 촬영은 이경모(李坰謨)가 담당하였다. 책의 내용은 사임당의 약전, 시, 글씨, 그림, 유적 등 다섯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전체 420쪽 분량의 3분의 1이 부록인데 사임당의 부, 모, 남편, 아들, 딸, 사위의 약전, 율곡기념사업, 사임당의 동상, 유적, 기념행사, 서화 발문의 원문과 해설을 함께 수록해 놓았다.

노산은 송담서원에 있는 사임당의 그림 풀벌레(草圖) 병풍 8폭에 대한 정호(鄭澔)의 발문(跋文)을 번역하기도 하였고 직접 발문을 짓고 민태식이 글씨를 썼다. 정호는 송강 정철의 현손이다. 그 외에도 모든 그림의 발문을 번역해놓았다. 사임당이 직접 쓴 초서 6폭에 대해서도 노산이 직접 발문을 썼다. 안견의 산수화를 본떠서 사임당이 그린 산수화의 발문을 1978년에 노산이 지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글씨는 갈물 이철경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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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신사임당.

경기도 파주군 천현문면 자운산 기슭에 율곡과 그의 부인 노 씨와 부모님 등 여러 가족들의 분묘가 있으며 그 옆에 본래 있었던 자운서원을 1973년에 묘역 전체를 정리하고 1974년 유적정화기를 세웠는데 이은상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분부로 묘역 전체를 정리하고 삼문을 새로 짓고 경내를 정화하여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므로 여기 그 전말을 새겨 전한다'라고 짓고 김충현이 쓰고 경기도지사가 세웠다.

1976년에는 강릉시 북평에 있는 오죽헌 정화사업을 실시하고 유적정화기념비를 세웠다. 유적정화기를 쓴 노산 이은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영단으로 이곳을 정화하여 새 면목을 갖추게 한 것은 참으로 천추에 전할 역사적인 사업'이라고 하였으며 여흥 민태식이 쓰고 강원도시자 박종성이 세웠다. 여성단체인 대한주부클럽연합회는 매년 5월 17일을 '신사임당의 날'로 정하고 첫 번째 기념행사를 1969년부터 매년 개최하였으며 사임당상을 시상하고 자운산의 사임당 묘소를 참배하였다.

제3공화국(1963~1972년)이 출발한 지 3년이 지난 1966년에는 두 번째 책인 <사임당과 율곡> 초판이 발간하였고 1994년까지 무려 6판을 거듭하였다. 첫 번째인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과 같은 출판사에서 발간하였다. 노산은 <사임당과 율곡>의 머리말에서 밝히기를 존경하는 인물에 관한 책이 필요하며 특히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대중적 교양본이 필요하여 사료에 근거하여 쉽게 쓰기 위해서 노력하였다고 한다.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제 조상 중에 위대한 인물이 있는 걸 잊어버리고 남의 나라 인물을 칭송할 줄만 아는 것이 어떻게나 탄식스런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의 '사임당의 노래', '율곡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사임당의 노래'를 보면 이미 국모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운 모습 흰 백합에 비기오리까/ 맑은 지혜 가을 달에 비기오리까/ 사임당 그 이름 귀하신 이름/ 뛰어난 학문 예술 높은 덕을 갖추신 이여/ 어찌 율곡선생 어머님 만이로리까/ 역사 위에 길이 사실 겨레의 어머니외다/ 겨레의 어머니외다'

'율곡의 노래'는 매년 열리는 율곡제에서 불리었다.

'해돋는 동해의 나라/ 예국의 오랜 옛터에/ 큰 인물 태어나시니/ 겨레의 스승이실레/ 눈부신 학문의 탑이/ 동방에 우뚝 솟았고/ 거룩한 구국의 정신/ 천추에 남아 빛나네/ 오! 율곡선생/ 그 이름 높이 외우리/ 오! 율곡선생/ 그 마음 길이 받드리'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가 8년 전에 죽었으나 그의 부인 노씨와 누이 매창(梅窓), 누이의 아들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에 참혹하게 죽었다고 한다.이은상은 <사임당과 율곡>에서 사임당에 대해서는 효녀, 착한 아내, 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으며 율곡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되어 지방행정을 쇄신하는 모습을 그렸다.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일화를 각각 수록해 놓았다. 사임당의 일화에는 유기쟁반에 그린 그림, 치마폭에 그린 포도 그림에 관한 내용이 있고, 율곡의 일화에는 율곡을 임신했을 때의 꿈, 낳을 때의 꿈이 각각 소개되어 있다.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과 가족계획 등에서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서 체제 내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신사임당을 적극 활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국모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배경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가르쳤던 이가 바로 신사임당이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논리에 합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노산은 앞장서서 역사 속의 인물을 대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의 틀에 맞는 신화 만들기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각주

김시업, <스승>, 도서출판 논형(2008년), 226쪽

정웅재 기자, 군사정권이 뺏은 장물 영남대, 박근혜는 어떻게 사유화했나?, 민중의 소리 2012년 11월 25일 자

이승욱, [발굴/박정희와 영남대-상] 청구대 공중분해와 영남대 탄생, 오마이뉴스 2004년 8월 3일 자

한홍구,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23) 뇌물바구니 영남대, 교주 박정희는 1원이라도 내셨는가, 한겨레 2012년 12월 28일 자

이병철, <湖巖自傳>, 나남출판사(2014년), 274쪽

조갑제, <박정희 5권 문제는 경제야>, 조갑제 닷컴(2006년), 242쪽

조갑제, <박정희 8권, 철부지 학생과 반동정객>, 조갑제 닷컴(2006년), 210~211쪽

이병철, <湖巖自傳>, 나남출판사(2014년), 274쪽

이권효, 영남대 높이 날다: 68년 전통과 비전,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동아일보 2015년 9월 8일 자

시사블로그 오주르디, 헌법기관 대통령이 개인 박정희로 '최준-최해청의 비극'

최해청은 국제어인 에스페란토를 익혀 서양사람들과 통신하고, 서양 문물에 접하는 창구로 사용했다. 2004년, 한국에스페란토협회(Korea Esperanto Asocio)는 '韓國 에스페란토 運動後見人'으로서 <야청 최해청 선생> 기념 책자를 출판했다.(대학비사 : 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교수신문 2008년 9월 22일 자) 노산은 1967년 3월 세계 에스페란토협회 국제이사였다

<영남대학교50년사>, 279쪽

신성구, <영남대학교 발전비사>, 삼광출판사(2014년)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210쪽

김교한 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 도서출판 경남(2017년), 61쪽

연합뉴스 2007년 6월 14일 자

헤럴드 경제 2018년 1월 24일 자

이소라, 박정희 정부의 민족문화사업과 국사교육,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외논문(2013년), 1쪽

이소라, 박정희 정부의 민족문화사업과 국사교육,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외논문(2013년), 29쪽

이은상,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성문각(1994년), 391쪽

이은상,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성문각(1994년), 395쪽

이은상,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성문각(1994년), 288쪽

이소라, 박정희 정부의 민족문화사업과 국사교육,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3년), 29쪽

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개마고원(1998년),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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