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6년째, 마산에서 제일 오래된 자동차 배터리집

자영업 폐업률은 계속해서 신기록을 세운다. 굳이 통계 자료가 아니라 주변 동네만 둘러봐도 알 수 있는 현실이다.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또 다른 꿈을 안은 가게로 서둘러 바뀐다. 그래서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이 오래된 가게다. 떼돈을 벌거나, 어마어마한 성공으로 반짝거리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든든한 직장처럼 꾸준히 시간을 쌓아온 가게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이곳은 아마 마산(현 창원시 마산회원·합포구)에서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아는 집일 거다. 특히 중장년층 이상 운전자라면 말이다. 한진상사는 마산 MBC 앞 '밧떼리집'으로 통한다. 김영도(61) 대표는 부모님의 일을 이어 받아 2대 째 한진상사를 운영하고 있다.

마산 자동차 배터리 대리점 시조격 중 유일하게 남은 집

가게 안에는 배터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배터리에 연결돼 돌아가고 있는 작은 선풍기가 무척 귀여웠다. 위치는 두 번 이동했지만 한진상사는 46년 동안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한진상사는 김 대표의 부모님 대에서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한진상사를 처음 차릴 적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까마득한 얘기처럼 들린다. 김 대표는 옛 마산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옛날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에 '세방전지'라고 '로켓트배터리' 만드는 공장이 있었어요. 지금 진해 보훈회관이 그 자리였어요. 지금은 창원에 있지만요. 아버지가 원래 해군이셨는데 제대를 하고 그 회사에 들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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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도 한진상사 대표와 아내 박종영(61) 씨. / 서정인 기자

배터리 만드는 회사를 다녔던 김 대표의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배터리 대리점을 차렸다. 당시 회사에서는 대리점을 아무에게나 내주지 않았다. 그만큼 배터리와 차에 대해 빠삭했다. 72년 한진상사라는 이름을 걸고 자동차 배터리 대리점을 개업했다. 사는 곳은 진해였지만 마산에서 가게를 열었다.

"마산 산호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산호동)에 태극정비공장이라고 정비공장이 있었거든요. 그 근처에서 처음 시작하셨었어요."

1대 한진상사는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고 했다. 자동차 배터리 판매·교환뿐 아니라 정비도 했기에 직원도 몇 명 두고 운영했다. 80년대 당시 자동차 가진 사람도 흔치 않았지만 그만큼 자동차 배터리 대리점도 몇 집 없었다.

"마산에 배터리만 전문적으로 팔고 달아주는 대리점이 그 당시 두 군데 있었어요. 한진상사랑 오동동에 경남상사. 조금 있다가 정우맨션 근처에 안전전기라는 데가 또 생겼고요. 자동차가 많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대리점을 할 때에는 배터리 하나 달려고 손님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했어요. 장사가 아주 잘 됐죠. 품절되면 예약을 해서 그렇게 갈아가고 했어요."

김 대표는 어린 시절 늘 부모님이 바쁘게 가게를 운영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결혼 후 부모님의 가게 일을 함께 해오던 김 대표는 가업을 물려받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적성에 맞고 안 맞고는 당시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소중한 부모님의 가게이기에 당연히 물려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 대표는 일단 가게 위치를 옮겼다.

"1990년 9월에 MBC 입구로 자리를 옮기고 한진상사를 내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냈어요. 부모님 한테서 아예 독립을 한 거죠."

무거운 배터리 탑차에 싣고 오만 데를 다 누비면 시절

아무리 탄탄하게 꾸려진 가업을 물려받았다지만 몇십 년 동안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처음에는 영업 활동이라는 게 필요 없었다. 규모도 줄였고 부모님 대에서부터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했기에 힘든 점이 없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어딘가 모르게 부족함을 느꼈다. 그때부터 자신도 모르던 '장사꾼' 기질을 펼치기 시작했다.

"뭔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근데 종종 농촌에서 손님들이 오시곤 했어요. 농기계에도 배터리가 들어가니까요. 그때 이쪽으로 한번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운기 배터리, 이앙기 배터리, 트랙터 배터리… 생각지 못한 시장이 거기 있었다. 배터리를 공급하는 업자가 없는 근처 농촌부터 돌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거래처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농기계 관련 업체 등에 배터리를 공급했다. 무거운 배터리를 싣고 온갖 지역을 다녔다. 믿음직스럽게 일을 하니 거래처에서는 자신보다 더 많이 팔아줄 업체를 소개해주었다. 차에 싣는 배터리 수가 눈덩이 불 듯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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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터리 회사에게 받은 감사패. / 서정인 기자

"경상남도에서 시작해서 전라도, 충청도, 안동까지 다녔어요. 대구 쪽 농기계 시장은 잡다시피 했고요. 그런 업체에서는 한 번에 100개, 200개씩 배터리를 받았거든요. 농기계 센터나 트랙터나 이앙기 같은 기계를 파는 농기계 대리점 또 농기계 수리 센터 이런 데에 납품을 하러 다녔어요."

사업은 김 대표가 운전대를 잡고 전국을 누비는 거리만큼 성장했다. 부부끼리 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 직원도 셋이나 두었다. 그때가 한진상사의 전성기라면 전성기일까.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에게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돌아다니며 도매로 버는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당시는 그저 표지판을 보고 기억에, 감에 의존하며 물어물어 길을 찾아가던 시절이었다. 가족들은 김 대표가 인간 내비게이션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오만 데를 돌다 보니까 길을 다 아는 거예요. 2.5t 탑차 를 몰고, 배터리 잔뜩 싣고 직원 두 명을 차에 태워서 1박 2일씩 도는 거죠. 직원들이 나 없이 외근 가다가 길이 없다고 전화가 오면 거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된다고 말해주고 그랬어요. 빠른 길 같은 거는 물론 다 알고요. 여관에서 1박 하고, 집에 안 들렀다 다른 거래처 가는 게 더 빠르니까 며칠을 내내 운전하다가 겨우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요. 다른 대리점 사장님들은 이런 걸 몰랐어요. 한진상사가 그때 엄청 많이 컸죠. 배터리 회사에서 상도 많이 받았고요.(웃음)"

가게 안에는 당시 받은 상패가 소중하게 진열돼 있었다. 97년부터 2003년 정도까지. 아직도 그 치열했던 40대 시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듯했다. 그러다 연간 배터리 15,000개 정도를 팔던 농기계 배터리 도매 일을 김 대표는 어느 날 미련 없이 접었다. 갑자기 일어난 사고 때문이었다.

"5년 넘게 농기계 배터리를 싣고 다녔는데 그때 큰 처남이 부장을 맡고 있었어요. 처남이 혼자 외근을 다녀오다가 88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때 마음이 확 접어지더라고요."

수입에 엄청난 타격이 올 게 분명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은 없었을까.

"아쉽기야 했지만 정신이 확 든 게 더 컸어요. 많이는 안 다쳤지만 전복사고가 일어나니까 진짜 큰일 나겠다 싶었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구나. 그래서 탑차도 팔아버리고 정리했어요."

어느 새부턴가 MBC 입구 '밧떼리집'으로 통해

그렇게 농기계 배터리 일을 접은 때가 2003~2004년 정도. 배터리를 교환해주는 소매도 함께 하고 있었지만 농기계 배터리 일에 집중한 탓에 한진상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산 시내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가게를 홍보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김 대표가 생각해낸 게 전단지다. 지금이야 전단지 홍보가 너무나 흔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는 자동차 배터리 대리점 하면서 전단지 돌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찾아오는 손님만 기다리는 시절이었거든요. 지역 안 영업에 신경을 덜 쓰다 보니 한진상사를 아는 운전자들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약도도 그리고 해서 전단지를 만들었어요."

아무 데나 막 뿌린 것이 아니라 배터리가 좀 나갈 만한 곳을 곰곰이 생각해서 돌릴 곳을 정했다. '천차만차' 등 중고차 단지부터 해서 자동차 매매 업체를 돌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매매 업체들을 거래처로 만들어나갔다. 2003년 태풍 매미가 왔을 때 마산 '댓거리' 방면이 물에 많이 잠겼었다. 그쪽 신마산에도 거래처가 있었던 김 대표는 하루 종일 거기 가서 배터리를 갈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노력하고 발로 뛰니 결과가 돌아왔다. 한진상사가 일반 운전자들에게도 많이 알려졌고 택시 기사들도 김 대표의 소중한 고객들이었다. 언젠가부터 'MBC 앞 한진상사'라는 말을 택시 기사들이 알아들으시더라고 했다.

"지금 택시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나이 좀 있는 분들이 많이 아실 거예요. 어느 날 택시 타서 MBC 입구 밧떼리집 갑시다 하니 '예' 하고 데려다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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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도 한진상사 대표와 아내 박종영(61) 씨. / 서정인 기자

이야기를 듣다 보니 꾸준히 가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충분했다. 한발 앞서 시장을 읽는 시선이 있었고 그저 툭 배터리만 갈아주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 서비스 정신까지 무장했다.

"다른 데는 어떻게 장사하는지 몰라요. 내 장사하기 바쁘니까요. 나름대로 기술적인 것도 자신이 있었고 배터리 해주고 나면 손님이 다른 손님께 소개해서 찾아오고 입소문도 나고 하더라고요. 손님들이 무작정 배터리 갈아달라고 요청을 해도 우선 점검부터 해주고 갈아야 하는 상태인지 보고 갈아드리죠. 덕분에 돌아온 건 '사장님 정말 양심적이네요'라는 칭찬이었고요. 옛날에는 6개 구멍이 뚫린 배터리에 전해액을 직접 넣어야 했는데 그 액이 황산이에요. 부글부글 끓어서 올라오는, 옷에 튀면 구멍이 나는 위험한 액이에요. 그거를 장갑 끼고 다 씻어서 깔끔하게 해주고 락카칠도 하고, 새것처럼 만들어서 주는데 누가 싫다 하겠어요.(웃음)"

양심 영업은 IMF를 이겨낸 밑바탕이기도 했다. 남들 다 어렵다고 할 때도 한진상사 앞은 늘 자동차로 가득했다.

장사가 잘된다고 해서 늘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앞에 얘기했듯 예전에는 배터리에 위험한 황산 희석액을 채워 넣어야 했다. 위험하고 무거운 배터리를 다루는 일은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이었다. 김 대표와 함께 가게를 꾸려온 아내 종영 씨도 함께 고생했다.

"농기계 배터리 할 때는 아내가 엄청 고생 많이 했어요. 규모가 커서 큰돈도 움직이고, 황산 희석액을 만들어서 식히고 다음 날 아침에 전부 배터리 뚜껑 다 열어서 조리개 같은 걸로 넣고, 여섯 구멍을 잠가서 싹 닦아서 박스에 넣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험한 작업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 대표 얼굴을 기억하고 계속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 그런 마음을 접었다.

"힘들어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집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해요.(웃음)"

이제 내려오는 과정이지만 마지막까지 최선 다할 것

김 대표는 지금까지 가게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딱히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딱히 비결이야 있겠느냐고 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일단 업종부터 막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택했다. 또 그 시장이 앞으로 향후 몇십 년은 튼튼하게 유지되는 시장이었다는 점.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한 발짝 앞섰다. 다른 업체에서 시도하지 않은 분야, 다른 지역으로 영역을 넓히기도 했고 영업 방법도 조금씩 앞서갔다.

"하다 보니까 천직이 되더라고요. 어느새 나이도 이렇게 된 거고요.(웃음) 성수기, 비성수기가 있어요. 배터리 수요가 많은 겨울철이면 정신없이 바쁜데 그때만 바라보고 장사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손님이 없는 봄에서 가을에는 농번기니까 농기계 배터리 싣고 다니면서 열심히 일했고 농기계 배터리 관두고 나서는 자가용이 많아졌으니까 개인 손님들을 받아 지역 내수시장을 잡으면서 성실하게 한 거, 그렇게 중간중간 계속 전략을 바꾸고 고민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세대교체가 된 지금은 자동차 배터리 판매 형태가 많이 달라졌다.

"이 시장도 구조가 많이 바뀌었어요. 요즘은 젊은 친구들이 할인매장으로 많이 운영하더라고요, 서울이나 타지에 인터넷으로 물건을 싸게 받아서 교체를 해주죠. 우리도 작년에는 대리점 해지했어요."

한진상사는 터를 원래의 자리에서 10m 오른쪽으로 옮겼다. 건강관리협회 건물 바로 옆 노란 간판이다. 40년 넘게 가게를 하고 있지만 가장 힘든 건 건물 관련된 일이라며 웃는다. 그래도 단골손님들은 김 대표 얼굴을 보고 어떻게든 가게로 찾아온다. 최근에는 회성동에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 그리로 가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 자리에는 직원을 중심으로 운영하려고 했지만 계획을 바꿨다. 오래된 손님들이 김 대표를 자꾸 찾았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여야 손님들이 '아, 사장님 여기 계시네' 하며 마음 놓고 차를 정차한다고 했다. 옛 마산에서 자동차 배터리 대리점을 처음 시작했던 두 가게는 없어진 지 오래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농담도 많이 듣는다.

"'사장님 돈 많이 버셨겠네예', '아직까지 합니꺼?' 이러시는데(웃음) 그냥 뭐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고 한 거죠."

김 대표는 이제는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얘기한다.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그만두는 날까지 지금처럼만 가게를 잘 꾸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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