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의존하던 조선시대 사대부 집단
균형잡힌 외교 않다 일제 식민지 전락해

1820년대 후반이었다. 해남 대흥사 스님 초의의순(草衣意恂·1786~1866)이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한 작은 암자에서 잘 차려입은 사대부 여러 명을 만나고 있었다. 동대문 바깥의 절에서 만남이 이뤄진 것은 초의의 신분이 승려였기 때문인데 그때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돼 서울 사대문(四大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법이 시퍼렇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런 승려가 당대의 인물로 꼽히는 사대부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 데는 당시 전라도 해남에서 유배 중인 정약용의 간곡한 기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을 초의가 처음 만난 것은 1809년 무렵이다. 초의는 뿌리가 깊고 인연이 간절한 수행자여서 스무 살 앞뒤로 깨달음을 얻어 평상시의 모습으로도 참선의 깊은 경지에 스스럼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불교 임제종의 법맥인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의 법을 계승한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의 선지를 이어받은 위대한 수행자였다.

특히 불교학 이외에도 유학·도교 등 당시 지식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여러 분야에도 통달하여 정약용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결국, 정약용이 먼저 당시 조선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서울의 사대부들과 교류해 볼 것을 제의했다. 정약용은 조선의 중책을 맡고 있는 몇 사람을 먼저 초의한테 소개했다.

그 당시 조선의 가장 큰 정치적 과제는 청나라와의 외교였다. 청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책이 지나치게 청국의존으로 기울고 있어서 암담한 기류로 흘렀다. 초의의 불교 철학인 중도(中道)·중관(中觀)·중정(中正)의 사상을 서울 사대부들이 받아들인다면 청나라 문물제도에 빠져드는 조선의 정책을 바로잡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초의는 사대부들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절에서 마련한 차를 나누면서 대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이 횟수를 거듭했다. 한 번은 초의가 해남 대흥사에서 만든 차를 끓여 그들에게 대접했는데 반응이 아주 안 좋았다. 그들은 오직 청국의 명차만 차라고 말했다. 초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선에서 나는 차도 근원은 중국과 같아서 색·향·기운·맛이 중국 차와 다를 바 없다는 것. 육안차는 맛이요, 몽산차는 약효가 있는데 조선의 차는 이 둘을 다 지녔다." 그러면서 "중국 차 문화사의 상징적 인물인 맛의 대가 이찬황이나 차 역사의 대가 육우가 살아있다면 초의의 말이 맞다고 할 것"이라는 자신감까지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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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는 다시 말했다. "조선이 존재하는 것은 청국문물의 우수함을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도 청국처럼 우수한 것을 만들고 지키고 생활화하는 데 있는 게 아니겠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올바름이야말로 모든 것의 올바름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날 뒤로 다시는 초의를 만나지 않았다.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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