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다. 보통 7월 25께까지 이어지는 장마가 그보다 훨씬 전에 끝나고 더위가 그 만큼 일찍 찾아왔다. 일찍 시작된 무더위는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중순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8월 6일 입추가 지나면서 약간 수그러들다가 다시 기세를 올리고 있다. 장마가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낮 최고기온이 33도를 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기온이 39도, 40도까지 오르는 날도 있었다. 이쯤 되면 '날씨가 미쳤다'라는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세월이 갈수록 우리나라 여름 기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낮 기온이 30도만 되어도 어른들이 '더워도 너무 덥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30도는 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그야말로 이런 '폭염'에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것은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나마 기온이 조금 떨어진 한밤에 나들이 삼아 두어 번 탄 것이 위안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행이 아니라 중학생 때 처음 내 손으로 모터사이클을 운전해본 이후 지금까지 나와 인연을 맺었던 모터사이클은 어떤 기종이었는지를 정리해보기로 했다.

기아 혼다 KM90

중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기억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께서 마을 이장을 오랫동안 하셨고, 우리 집에는 읍사무소, 농협, 통계사무소 직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통계사무소 직원 중 한 분이 빨간색 기아혼다(이후에 대림자동차로 됐다가 대림오토바이로 분리됐다) 빨간색 KM90을 타고 다녔다. 사실 이 모델이 정확한 것인지 자신이 없다. 다만 모양과 크기로 가늠했을 때 이 모델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이 모터사이클은 90cc였다. 클러치 레버를 잡고 기어를 바꿔야 하는 수동기어 방식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그분 몰래 이 녀석을 몰래 끌고 나가 처음으로 '모터사이클'이라는 신세계를 경험하고는 그 이후로 늘 마음 한 구석에 모터사이클을 품고 살았다. 중2 학생이었던 내가 그때 수동 모터사이클 운전법을 어떻게 배웠는지는 지금도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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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가까이 타고 있는 BMW R1200RT. 이동수단으로서 기계적 성능과 편의성의 뛰어나다. / 조재영 기자

 

대림혼다 DH88

우리는 모두 이 기종을 88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 중반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형편이 조금 나은 학교 선생님들은 기아 프라이드, 현대 액셀·프레스토, 대우 르망을 구입해 타고 다녔다. 그때 모터사이클업계에서는 88이 선풍적이 인기를 끌었다. '세미오토'라고 해서 클러치를 잡지 않고 기어를 변속하는 방식이었는데, 섰다가 달렸다가 마음대로 해도 시동이 꺼지지 않아 좋았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이 기종을 타고 출퇴근을 하셨던 분들이 여럿 있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형이 어디서 주워왔는지 고물 88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그 형은 손재주가 있었다. 매날 고물 88을 뜯었다가 붙였다가 했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 다녔다. 차대와 엔진, 핸들과 브레이크만 있는 고물이었지만 달리기는 잘했다. 나는 가끔 그것을 얻어타고 다녔다. 밤에는 그 고물 오토바이에 3명이 타고 다니기도 했다. 밤에 달릴 때에는 헤드라이트가 없어 손전등을 갖고 다녔다. 맨 앞사람이 운전을 하고, 그 뒤에 탄 사람이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면서 달렸다. 그 모양새로 온 천지를 돌아다닐 기세였다. 상상해보면 정말 웃기는 장면 아닌가? 그래도 그때 우리는 정말 신났었다.

대림혼다 택트

대학 때 군대에 가기 전에 휴학을 했고, 입대 전까지 창원에 있는 큰 공장에서 생산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당제였는데 벌이가 꽤 괜찮았다. 그 돈으로 50cc 스쿠터를 사서 아버지께 드렸다. 그 바람에 아버지께서도 수십 년간 유지해오셨던 교통수단 '자전거'를 버리고 '모터사이클'로 갈아타셨다. 그 당시만 해도 배기량 50cc 이하 이륜차는 등록 의무가 없었다. 등록의무가 없으면 보험에 가입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번호판이 없기 때문에 도난당하면 찾을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 택트는 내가 아버지께 드린 첫 번째 선물이었고, 한동안 아버지의 발이 되어주었다.

대림혼다 CBX125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었다. 그 전 나는 3학년 한 학년 전체를 통째로 동아리 활동에 집중했었다. 연극동아리였고 나는 회장이었다. 그해 우리는 전국대학연극제에 출전했다. 예선을 거쳐 결선에서 은상을 차지했다. 거금 300만 원 상금으로 받기도 했다. 시상식은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열렸고, 개그맨 전유성 씨가 사회를 봤었다. 전유성 씨가 내게 소감을 물었을 때 "비록 대상이 아닌 은상을 받았지만 우리는 행복하다. 대상을 받은 팀은 이제 내려올 일만 남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올라갈 계단이 두 계단이나 남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었고 나의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함께 자축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것이 1994년 가을의 일이다. 1995년 휴학하고 고향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지역 주간신문을 알게 됐다. 그 신문사 사장님의 권유로 복학할 때까지 기자 일을 하게 됐다. 1995년은 주민들이 직접 시장·군수·도지사를 뽑는 첫 지방선거가 열린 해였다. 그때 내 발이 되어준 것이 바로 CBX125였다. 배기량이 125cc밖에 안 됐지만 무척이나 잘 달리던 모터사이클이었다. 외가에 있던 것을 내가 일에 필요하다는 핑계로 가져와 실컷 타다가 복학할 무렵 돌려주었다.

효성스즈키 크루즈

대학을 졸업할 무렵, 타고 다니던 '티코'를 팔고 새 교통수단으로 구입했던 모터사이클이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을 흉내 낸 기종이었는데 당시는 꽤 인기가 있었다. 졸업할 당시에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다. 지각이 있던 동기들은 '증권', '언론'을 선호했었다. 나는 철이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진학을 염두에 두었었는데 알아보니 학비가 비쌌다. 그래서 1년 정도 벌어서 가야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내가 가진 조건으로 비교적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 '퀵서비스'였다. 택시 일을 해보려고 택시기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퀵서비스가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달 동안 그 일을 했다. 서울에서 가장 큰 업체에서 일했는데 그 업체 이름이 바로 '퀵서비스'였다. 그러니까 '퀵서비스'라는 회사 이름이 일반명사화한 것이다. 많이 벌 때는 하루에 10만 원 이상 벌기도 했지만 날씨 때문에 운행이 어려운 날도 많았고, 고장 난 모터사이클을 수리하는 비용도 적지 않았다. 겨우 125cc 배기량으로 하루에 200~300km를 매일 달리는 것은 사람에게도, 모터사이클에게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퀵서비스는 고향으로 오면서 그만두었고 '크루즈'는 대학 연극동아리 후배에게 넘겼는데 그 이후로는 어찌 됐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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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업무에 찌들려 있던 시절, 내게 돌파구가 되어주었던 스쿠터다. 대만 킴코에서 생산한 익사이팅250. 전국일주 중 포항 호미곶에서 찍은 사진이다. / 조재영 기자

 

킴코 익사이팅 250

지역 주간신문과 잡지사에서 일하다가 경남도민일보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것이 2000년 7월이었다. 입사 후 지역여론부에서 함안 파견을 담당하다가 곧 시민사회부로 옮겨 마산동부경찰서와 함안 파견을 겸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남지방경찰청, 창원지검, 창원지법을 출입하게 됐다. 정말로 바쁜 나날들이었다. 실력이 있든 없든, 싫든 좋든 '필드'를 누비며 조직에서 원하는 성과를 내야 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다리를 다쳐 1년 정도 내근을 한 뒤 마산시청, 경남도의회를 거쳐 창원시청을 맡게 됐다. 중압감이 컸다. 아이가 어떻게 커가고 있는지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일에 대한 중압감이 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뛰어난 기자였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평범했다. 그렇더라도 심리적 부담은 적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때 돌파구로 찾은 것이 '모터사이클'이었다. 기왕이면 125cc보다 큰 것을 타고 싶어 우선 2종소형면허를 땄다. 그리고 모아둔 쌈짓돈으로 킴코 익사이팅250 중고 스쿠터를 샀다. 250cc 수냉엔진을 장착한 모델이었는데 출력도 높았고 잔고장도 거의 없었다. 주기적으로 소모품만 교환해주면 오랫동안 탈 수 있는 기종이었다. 킴코는 대만 기업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대만 모터사이클 산업이 일본 못지않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또 대만의 그런 산업 수준은 대중화된 스쿠터 교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임도 알았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미국발 금융 위기가 왔을 때 회사는 전 직원 1개월씩 순환 휴직을 했다. 그때 나는 열흘간 그 스쿠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 일주 중에 서울에 갔을 때 소모품인 드라이브 벨트를 교체한 것 말고는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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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당시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중 배기량이 가장 작았으면서도 가장 잘 달렸던 스포스터883R. / 조재영 기자

 

할리 883

'남자라면'이라는 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쓰지 않을 수 없다. '남자라면' 누구나 모터사이클, 그중에서도 특히 '할리데이비슨'에 대한 동경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부정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남자라면.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익사이팅250으로 모터사이클 라이프에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할리데이비슨 타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각시, 아이와 함께 창원에서 영화를 봤는데, 각시가 아이를 차에 태워가고 나는 익사이팅250을 타고 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출발하는데 지하주차장에서 동시에 출발했다. 집에 도착한 뒤 각시와 아이는 내가 스쿠터를 타고 가는 모습이 꼭 퀵서비스 아저씨 같았다고 말했다. 퀵서비스 종사자들께는 미안하지만(앞서 말했듯이 나도 한때는 퀵서비스 종사자였다), 나는 그 순간 기분이 나빴다. 그럼 퀵서비스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뭘 타야 할까? 바로 할리데이비슨이었다. 적어도 할리데이비슨 타고 퀵서비스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나중에 보니 있더라. 그분은 채산성이 극히 좋지 않을 것이다. 연비와 관리비·수리비 측면에서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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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데이비슨 로드글라이드. 2011년식이다. 당시 할리데비슨에서 생산되는 기종 중 가장 큰 배기량(1700CC)에다 가장 상위 클래스 모델이었다. / 조재영 기자

 

익사이팅 스쿠터를 팔고 쌈짓돈을 얹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각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거금 500만 원을 보태준다. 대략 1000만 원으로 거의 새것 같은, 그리고 많은 옵션이 장착된 883cc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살 수 있었다. 비싼 종합보험까지 들었더니 예산을 초과해버렸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할리데이비슨에 흥분해 있었을 뿐이다. 틈만 나면 타고 나가서 온 천지를 쏘다녔다. 나중에는 각시가 눈총을 쏴댔기 때문에 출동하는 횟수를 줄여야 했다.

할리데이비슨 883R을 타는 동안에 경남 전체를 아우르는 '클럽 블랙라벨'을 창립했고 초대 회장까지 했다. 클럽의 원래 이름은 '경남아메리칸라이더스클럽'이었는데 인터넷카페 검색을 통해 너무 많은 회원들이 가입해서 검색이 쉽지 않도록 이름을 바꿨다. 그 오렌지색 883R은 나와 함께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거리를 함께 달렸다. 그런 뒤에 클럽 후배의 손에 넘어갔다.

할리데이비슨 로드글라이드커스텀

모터사이클 클럽을 활동을 하다 보면 큰 놈, 작은 놈, 예쁘게 꾸민 놈 등 여러 모터사이클을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특징과 장단점도 알게 된다. 다른 클럽에서는 큰 놈을 타는 회원이 작은 놈을 타는 회원을 은근히 무시한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클럽에는 그런 회원이 없었다. 회장인 나부터 작은 놈을 타고 있었고, 내가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크기를 가지고 어깨 힘을 주겠냐?"는 말을 대놓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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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데이비슨 로드글라이드를 타던 시절,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호그랠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찍은 장면이다. 맨앞 오른쪽이 나다. / 조재영 기자

 

그런데 말이다. 나도 한 번 큰 걸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타던 883cc도 배기량이 커서 힘이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1700cc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발동했고, 하만카돈 오디오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편의장치를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은 놈은 앞쪽에 바람을 막아줄 페어링이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를 타고나면 무척이나 피곤했다. 그래서 크고, 편의장치도 많고, 바람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페어링이 큼직한 기종을 타보고 싶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종 중 하나가 미국 경찰 모터사이클로 알려져 있는 기종이다. 할리데이비슨 일렉트라 글라이드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것이 스트리트 글라이드, 울트라클래식 등등의 모델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 모델은 너무 '아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찾아낸 기종이 '로드글라이드'다. 앞코가 상어 코처럼 뭉턱 잘려나간 것 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 모양이 낯설어 보이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꽤 멋져 보인다.

새것은 찻값만 3500만 원이나 되고 옵션을 장착하면 4000만 원 가까이 되기 때문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새것에 가까운 중고를 알아보다가 3000만 원에서 약간 못 미치는 금액에 좋은 매물이 나왔다. 라이딩 버디와 함께 대구로 달려가서 실물을 보고 계약을 했다. 당시가 2013년이었고, 계약한 모터사이클은 2011년식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가 상어 대가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줄임말로 '상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상대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중형차에 버금가는 출력과 편의장치가 있었다. 실제 주행도 고급승용차를 타는 것처럼 안락했다. 장거리를 타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거기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뽀대'까지 났으니 정말 신나게 탔었다. 다만, 중형차보다 훨씬 많은 유지관리비가 들어갔다. 예를 들면, 할리데이비슨 순정 뒷타이어 하나가 45만 원에 작업공임 5만 원이었다. 그러니까 뒷타이어 하나 교체하는데 50만 원이 들었다. 승용차 타이어는 이보다 훨씬 싼 데다 최소 5만Km는 타지만 대형모터사이클은 1만~1만5000km만 타면 교체해야 한다. 로드글라이드를 타는 동안 내 지갑은 항상 홀쭉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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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데이비슨을 타던 시절에는 멋을 잔뜩 부리고 다녔다. / 조재영 기자

 

BMW R1200RT

할리데이비슨 로드글라이드를 2년 정도 타다가 처분하고 새로 영입한 달리기 선수가 BMW R1200RT다. 숫자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배기량이 1200cc다. 그 전에 타던 할리데이비슨 보다 배기량이 확 낮아지긴 했지만 출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배기량은 적지만 할리데이비슨 보다 고회전 엔진이어서 출력은 모자람이 없다. 할리데이비슨을 버리고 BMW로 넘어온 이유는 두 가지다. 할리데이비슨은 기본적으로 소리도 크고, 진동도 크다. 그래서 한밤중에 아파트에서 들고 날 때 본의 아니게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소음과 진동이 법적 수치 이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는 너무 무겁다는 점이다. 혼자서 시동을 걸지 않은 채로는 유턴을 하기도 어렵고, 앞뒤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할리데이비슨 보다는 조금 가벼운 기종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왕이면 로드글라이드처럼 출력도 크고, 편안하고, 편의장치도 많은 기종을 바랐다. 그 기준을 갖고 찾아낸 것이 바로 이 녀석이다. BMW 모터사이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공랭 박서엔진을 장착하고 있고, 이미 출고된 지 8년 가까이 됐지만 2018년 현재 판매되고 있는 고급자동차 부럽지 않은 편의장치가 달려있다.

나와 함께 달린 지 3년을 지나 4년을 채워가고 있다. 매월 한 차례씩 나와 함께 전국으로 모토캠핑을 떠나고, 울적할 때, 혹은 무엇인가 허전할 때, 갈증이 날 때 나를 무념무상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있다. 나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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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자동차 시티100을 커스텀한 모터사이클이다. 출고된지 오래된 모델인데 카울을 벗기고, 바퀴와 핸들 등 일부 부품을 다른 제품으로 바꿔 멋을 냈다. / 조재영 기자

 

CITI 100 커스텀

대림자동차에서 생산된 100cc 기종이다. 원류는 일본 혼다의 '커브'이지만, 원류에 필적하는 성능을 보여주고 있는 기종이 바로 대림의 시티 시리즈다. 나는 내 블로그에서 모터사이클 관련 포스팅을 할 때 시티 시리즈에 '최고명차'라는 수식을 아끼지 않는다. 배달 등 비즈니스용으로도, 출퇴근용으로도, 커스텀용으로도, 어느 쪽으로 활용해도 좋은 기종이 바로 이 기종이기 때문이다. 우선 구입 가격이 싸고, 튼튼하고, 잔고장 없고, 부품값이 싸서 유지관리비도 매우 저렴하다. 거기다 조금 손을 대면 멋지기까지 하다. 어찌 '최고명차'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할리데이비슨 883R을 탈 때 집에서 마실용으로 손쉽게 타려고 시티110을 구입해 갖고 있다가 자주 탈 형편이 되지 않아 처분했었다.

그리고 작년에 중고 100cc 시티를 예쁘게 꾸민 매물이 나왔길래 대뜸 사버렸다. 기대했던 대로 귀엽고, 멋진 녀석이었다. 비록 뼈대와 핸들, 엔진, 바퀴 정도만 붙어있을 정도로 헐렁해 보이지만 단 한 번 킥으로 시동이 걸리고 휘발유만 넣어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갈 것 같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녀석 역시도 예전에 있던 시티110처럼 덮개만 뒤집어쓰고 있는 날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요즘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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