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목마른 자,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이 물을 마셔라
시에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거 금융·상업의 중심지
800년 넘은 우물 건재해
산 지미냐노 13세기까지 상거래 활발
'권력 상징' 높은 탑 많아
피렌체에 주권 뺏겨 쇠퇴

베르테르 열병(Werther-Fieber) 때문이었을까? 여행을 떠나오기 12년 전에 발간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전 유럽에 흑사병과도 같은 질병을 퍼뜨려 놓았다. 자살이라는 것, 그것도 전염병처럼, 유행병처럼, 들불처럼 번져 나간 그 회오리, 괴테인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레초와 시에나는 이탈리아의 교통 체계에 있어서는 주변 지역에 있다. 버스는 토스카나 지방의 구릉지를 넘고 또 넘었다. 아침 안개가 능선마다 지키고 있었지만 구릉지를 내려오면 다시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에나

저 멀리 언덕에 시에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에나 대성당과 시청 그리고 만지아탑(Torre del Mangia)이 한눈에 들어왔다. 토요일의 캄포광장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15도가량 바닥이 경사진 캄포광장은 그것만으로도 이 도시의 명물이 되고 남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는 등 망중한을 즐겼다.

10유로를 주고 등산을 하는 것처럼 올랐던 만지아탑에서 내 눈에 들어온 저 광활한 대지, 토스카나의 공기와 태양 빛이 한껏 쏟아져 내려왔다. 서쪽으로 지는 태양에 따라 캄포광장의 해 그림자는 점점 동쪽으로 움직이고 사람들도 이 해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기를 거듭했다.

만지아탑에서 본 시에나 구시가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에나의 역사 지구인 구 시가지는 세월의 무게만큼 도시도 무겁게 느껴졌다.

이 도시는 12세기경 이미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갖춰진 이래 지금까지 중세 시대의 도시 형태가 온전하게 보전되어 오고 있는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도시 가운데 하나다.

일종의 계획도시로서 캄포광장은 이 도시의 주요 3개의 도로가 만나는 중심지에 조성되어 있어 중세 때에는 이 광장을 중심으로 금융과 상업 활동이 집중되었다.

광장을 벗어나 아래쪽으로 나 있는 골목길에는 더욱 세월의 무게가 한껏 묻어 나 있다. 집집마다 둥근 쇠고리가 대문 옆 벽면에 박혀 있다. 중세 때 말을 매었던 곳이다. 일종의 차고인 셈이다. 이런 집들을 옆에 두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창밖에 빨래가 줄에 매달려 있는 집이 많다. 햇빛이 좋아 이날을 택해서 빨래를 했을 수도 있지만 집이 좁거나 예전부터 해 왔던 방식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장에만 누웠다가 하늘만 바라보고 가겠지만 정작 이곳에 이런 보물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시에나 시에서 발행한 홍보물에도 그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발품을 파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선물이리라. 폰테르브란다(Fonterbranda)라는 이름을 가진 지하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약 100평이 넘는 저수조에는 물이 넘쳐흘렀고 수조 안에는 금붕어가 놀고 있었다. 이 우물은 고대부터 사용되어 왔다는데 이 도시의 생활용수뿐 아니라 경제활동 특히 면직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다.

이 우물은 서기 1193년에 체계적으로 조성되어 올해로 824년째를 맞이했다. 지난 세기 그러니까 대체 수로를 마련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수로를 통하여 도시에 물을 공급하였다. 물은 3단계로 공급이 되었다고 하는데 1단계에서는 음용수로, 2단계에서는 동물과 가축의 먹이로, 마지막 단계에서는 허드렛물로 사용되어 물의 체계적 활용에도 깊은 고민을 하였다.

골목길을 타고 올라와 해가 질 무렵 성 도메니코 성당 언저리에서 만지아탑과 시에나 대성당 두오모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화석이 겹겹이 쌓인 도시처럼 굳은살로 두꺼워진 도시가 내 앞에 있었다. 여기에 서쪽에서 내리는 빛이 이 건물들에 집중적으로 비춰져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빛이 반사되어 나왔다.

◇산 지미냐노

다음날 아침 일찍 산 지미냐노행 버스를 탔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운행되는 버스가 대폭 축소되어 논스톱으로 가는 버스는 없고 포지본시(Poggibonsi)라는 동네에서 완행버스로 다시 갈아타야만 했다. 승용차로 가면 불과 50분 거리에 있는 것을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고 하는 시간까지 합하니 거의 3시간가량이 소요되었다. 화장실 문도 닫혔고 돌아올 때 이용했던 포지본시-산지미냐노 기차역은 아예 무인역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관광객이 많이 올 때 인력을 집중 배치하건만 이들은 관광객보다는 시민의 휴식이 먼저인 듯하다.

산 지미냐노와 시에나는 도시의 운명이 닮은 점이 많다.

산 지미냐노는 1119년에 자치도시가 된 이래 13세기까지 국제 상거래가 활발하였는데 특히 무게당 가격이 금과 비슷하게 거래되는 샤프란이라는 고급 향신료 산업과 금융 거래에 힘입어 급속한 성장을 지속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층 타워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등 마천루를 이루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수십 개의 탑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치 뉴욕의 어느 골목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산 지미냐노의 마천루, 한때는 뉴욕을 방불케 했던 도시였다.

하지만 이런 급속한 발전은 곧 사그라지는 법, 이 도시의 황금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1315년 유럽을 급습했던 흑사병과 이로 인한 기근, 도시 내부의 갈등과 분파로 인해 결국은 주변화로 치닫고 쇠퇴를 거듭해 피렌체에 스스로를 양도하고 방어를 요구하게 되면서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운명은 때로는 얄궂다. 피렌체에 주권을 뺏긴 두 도시는 그 후 재도약을 하지 못했다. 한 번 경쟁에서 탈락할 경우 재기가 어려운 것은 인간사회나 도시의 운명이나 비슷하다.

중세 이후 도시 발전의 주도권을 이웃 나라들에 내어 준 이래 스스로 자발적, 자족적 발전을 꾀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 도시들은 활력 있는 도시는 아니다. 스스로 경제 규모를 키우고 부를 창출하는 도시가 아닌 관광객을 통한 의존적 경제활동에 기대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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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가 보전으로 이어지다

하지만 하나의 결과나 결정이 완벽하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거나 완벽하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다행일 수 있고 불행일 수도 있다. 음지에도 작은 구멍을 통하여 빛이 들어오듯이 이들의 쇠퇴와 주변화는 오히려 전쟁으로 인한 파괴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고 도시의 형태와 중세의 건축물들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과 같은 중세도시 산 지미냐노로 남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시에나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글·사진 시민기자 조문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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