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안중에 없는 안희정 무죄판결
가해자 중심의 견고한 인식 탈피해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무죄 판결을 두고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성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나 역시 당시 '안희정 1심 무죄'라는 기사를 한참 멍하니 보고 있었다. 구속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무죄는 정말이지 충격적인 결과였다. 위계·위력에 의한 성폭행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결국 '맞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씁쓸하고도 비참한 생각마저 들었다.

1심 재판부는 안희정 전 지사의 무죄 이유로 위력 관계는 있었으나 위력 행사는 없었다는 점, 피해자에게서 피해자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그야말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위계와 위력에 의한 성폭행은 업무상 상하관계가 수반되기 때문에 폭행이나 협박 등 구체적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권력이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따라서 위계·위력에 의한 수많은 성추행과 성폭행은 대부분 구체적 증거가 없고 따라서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을 존중해왔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피해자가 충분히 거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위력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직장 상사, 혹은 권력 관계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지시나 폭언, 끈적한 시선, 불쾌한 스킨십을 당해도 참는 경우는 살면서 숱하게 있다. 그 자리에서 '불쾌하다', '그만하라'고 말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결정권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권력관계에 있는 사람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해서도 아니다. 그것에 대한 거부 의사가 그 행위에 대해 거부뿐 아니라 직업과 생계의 중단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위계와 위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개인의 결정권을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하다.

무엇보다 무죄 근거로 삼은 피해자성, 피해자다움이라는 것은 더욱 황당하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해 당일 저녁에 와인바에 가고 안희정 전 지사가 머리를 했던 헤어숍에서 머리 손질을 받은 점을 들어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다운 행동이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성폭행 피해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 자책하며 눈물 흘리고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성폭력 피해자다움에 대한 지적은 너무나 부적절하다.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에 대해 여성들이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 아니냐"며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좌절시켰던 가해자 중심의 성인식을 이번 판결이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위계·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은 이런 이유로, 이러한 두려움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권력형 성범죄는 일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누적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미투'였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이러한 미투 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미투 운동 이후 달라졌을 것이라는 여성들의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무엇보다 힘들게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던 여성들을 또다시 좌절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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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이 끝이 아니니 2심 판결을 기대해보자는 말이 그래서 좀처럼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견고한 가해자 중심의 인식이 사실은 두렵다. 이번 판결에 대한 여성들의 좌절과 분노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재판부 나아가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고민해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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