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김해·인천… 생계 위해 어디든 다녀야만 했다
2살 때 엄마 떠나고 여수서 생활
12살에 아버지·오빠들 살림 챙겨
함양 시집서도 장리쌀로 연명해
자식과 떨어져 식모살이 경험도
과일장사·식당일로 버틴 한평생

"내는 김제서 태어났는데, 우리 엄마가 내 두 살 때 돌아가셨어. 해방되기 전이었지. 내는 엄마 얼굴도 몰라. 아부지가 엄마 죽고 나서 일찍 여수 가삐쓰. 그니까 우리도 따라 갔지. 내가 서너 살 됐을까."

1941년생 이봉덕 엄니. 홀아버지는 아이들 넷을 데리고 여수로 갔다.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시설에서 중환자들 밥 해주는 일을 했다.

"오빠가 서인데 오빠들이랑 내도 아부지 따라 여수로 갔어. 우리는 아부지가 일하는 시설에 살 수도 없고, 방 한 칸도 없어 가꼬 처음에는 너므 집에서 살아야 했어."

몇 년 지나 형편이 좀 되자 산 밑에다 '하꼬방' 같은 집을 짓고 다 모여 살 수 있었다. 집안에 여자라고는 혼자니 이제 열두어 살 된 가시내는 집안 살림을 다 해야 했다. 학교에 적을 두고 나중에 졸업장도 받았지만, 출석을 하거나 학교서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나무 해서 불 때 밥 하고 빨래하고, 낮에는 밭일이며 뭐든지 돈 되는 일을 찾아 해야 했다. 10대 시절은 형제들끼리 어떻게 해서라도 굶주림을 면하는 게 가장 큰일이었다.

1941년생 이봉덕 엄니는 집을 떠나 부산·김해·인천 등으로 전전했다.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장리쌀로 이어갔던 가난한 시집살이

스물한 살. 어쩌다가 함양 골짝으로 시집을 왔다. 중매쟁이를 따라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경상도 땅 골짜기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시집을 왔다.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인거라. 사회 물정을 모르니 요리 따라 왔제. 영감 아는 사람이 중매를 섰거만. 왔더니 이 집구석은 아무것도 없어. 집만 덜렁하고…."

시집은 서 마지기 논이 전부인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집이었다.

시집오기 전 스무 살 무렵.

"먹을 끼 없었어, 먹을 끼. 그때만 해도 장리 이자를 내야 되는 거라… 10되를 내가 먹으몬 농사 지가꼬 가을에 3되를 더 보태 13되를 조야 댔어. 저 골짝 논 서 마지기 있는데 농사 지 다 주고 나몬 묵을 쌀이 없어, 또 빌려야 해. 맨날 반복이야 반복. 헤어나지를 못했어. 장리쌀만 안 내몬 좀 살것다 싶었어."

신랑은 12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인물이 참 좋았다. 손이 좀 불편했지만 그는 목수였다.

"기와집 같은 거 짓고, 옛날 집에 있는 문살 같은 거를 짰어. 이리이리 해서 문살 짠 거 이것도… 그냥 못 안 박고 하는 거… 솜씨가 좋아가꼬 몇 십 년이 됐는데도 지금도 그냥 있대. 문살이."

하지만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 하는 사람이라 봉덕 엄니가 힘들었다.

"너무 고지식해. 사람이 살다 보면 강도 건너고 물도 건너고 산도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없으면 앉아 있는 기라, 미련만 떨고. 우리 애들도 하나도 제대로 멕이지 못했어. 내가 안 살라고 몇 번이나 망상거렸어."

시집에는 시어머니 혼자 있었다. 시아버지는 집에 있기보다는 만주로 일본으로 다니다가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엄마 얼굴도 모르지만 엄마가 그리워서 보고파서, 시집올 때는 시어머니 있으면 내가 잘 공경해야지 마음먹었어, 근데 시누이 역성만 들어. 그라니까 언젠가부터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대. 자꾸 그리싸니까."

가난한 집에 제사는 줄줄 했다. 한 번은 제사 때문에 집안에 난리가 났다. 그런데도 남편은 방문을 열고 두어 마디 하고는 모른 척 문을 닫아버렸다.

"천불이 나고 부애가 나서 옷 입은 채로, 나이가라 치마에 다우다 웃옷 입은 채로 나갔제. 애들은 방에서 울고쌌고."

봉덕 엄니는 그 길로 두말도 안 하고 집을 나갔다. 이 모든 게 집안이 가난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든지 돈을 벌어야 했다.

1980년대 중반 눈이 한창 왔던 겨울날 마을 우물가에서.

◇집 떠나 전국 곳곳으로… 먹고살기 위해 전전한 삶

그날 밤 읍내에서 하룻밤을 겨우 얻어 자고, 이른 아침 부산 양정으로 갔다. 무작정 가서 닿은 곳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시골 아지매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모살이였다.

"한 달에 5000원 받았어. 그 집에 입주해서 살림 살고, 아이 봐주고. 그 집 아줌마가 선생인기라. 그래도 그기는 월급이 있제."

그곳은 우루묵처럼 개울을 가운데 두고 집집이 들어서 있는 마을이었다. 일을 마치고 좀 쉬려고 동네 앞에 나오면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꼬물꼬물, 집에 있는 애들이 눈에 밟히는 거야. 내가 엄마 없이 컸으니께. 고생하것다싶아. 곰보든 째보든 얽었든 엄마가 있어야제. 갸들이 보고파서 앞집에 운곡할매라고 살았는데 거기다가 편지를 썼는디…. 백낱같이 찾아온기라."

편지에 적힌 주소를 들고는 시동생이 봉덕 엄니를 찾아왔다. 애들 둘까지 데리고 왔다. 시동생은 아이들을 무작정 놔두고 가버렸다.

"놔두고 가삐쓰. 작은놈은 엄마 아이라고 실실 피했삐고. 큰놈이 엄마야 엄마야 해도 안 와. 품에 안 와. 너그 엄마 어디 갔니? 하고 물으니 우리 엄마 돈 벌러 갔어예 해. 시어매가 애들한테 그리 말했었나벼."

남의 집살이 하는데 아이들까지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봉덕 엄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우루묵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밤에 집 나간 지 석 달 정도 됐을 무렵이다. 형편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이번에는 김해로 갔다. 거기서 다방 아가씨들 밥을 해주는 일을 했다.

"비가 부실부실 오는데, 아가씨들이 추워서 연탄불 구멍을 확 열었던 가봐. 그날 밤 연탄가스 먹고 다 뻗어삐쓰. 그래 가꼬 겁이 난 기라. 감옥 가는 긴가 싶었어. 수돗가 물을 받아 확 뿌릿제. 다행히 다 깨어나더라고."

그 길로 부산 대덕으로 갔다. 그 무렵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대덕에서 같이 살면서 남편은 일을 하러 나가고, 봉덕 엄니는 리어카에 채소, 과일 장사를 했다.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떼서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고 대구 가서 홍시 떼서 팔기도 했다.

"한 번은 리어카를 끌고 구포다리를 건너오는데 우박이 마구 쏟아지는 거야. 다리 한가운데서 어디 피할 데가 있어야제. 구루마에 채소며 과일들이 있는데 전부 우박을 다 맞고. 우박을 맞으모는 팔 수가 없는데. 내가 우찌 몸으로 가릴려고 해도 안 되고. 내도 우박을 맞으니 온 몸이 아픈 거야. 동동거리다가 안 되니까 고마 다리 한가운데서 퍼질고 앉아 엉엉 울었제. 서럽고 서러워서…."

1980년대 중반 눈이 한창 왔던 겨울날 마당 장독대에서.

다시 우루묵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살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논도 없고 돈 벌 일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혼자 인천으로 갔다. 식당에서 일했다. 다행히 그 식당에서는 몇 년을 일할 수 있었고, 돈을 조금 모았다. 집을 마련하려고 보험을 하나 들기도 했다.

봉덕 엄니의 한평생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식들 조금이라도 먹여 살리기 위한 거였다. 남편은 3년 전에 작고했다. 지금은 노령연금과 아들들이 주는 용돈, 노인 일자리 해서 살고 있다.

"왜 그리 집을 나갔냐고? 먹고살라고 나갔제. 요서는 먹고살라고 해도 암것도 없시니. 넘의 논도 부치몬 장리쌀로 다 줘야 하고. 산다고 발버둥 친 게 다 허사야. 시시콜콜 다 얘기 안 해서 다 몰라. 해봐야 그렇고. 내 속을 누가 알까 싶어." /글·사진 시민기자 권영란

이 기획은 <할매열전>이지만, 인터뷰이들 대부분 필자의 어머니 연배이기도 하고, "그래도 할매라 부르지 마라"는 청이 있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는 본문 중 인터뷰이 호칭을 할매라 하기보다는 '엄니'로 통일합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