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뜨거웠던 노동자 대투쟁 현장
자본 종속된 노동 상황 달라지지 않아

안녕하신가 동지여. 선수미 공장에서 용접하던 이석규일세. 늘 이맘때쯤 해마다 그대들이 잊지 않고 춘향이 고개 내 집을 찾아주어 고맙기 그지없소. 하지만 사는 경계가 다르니 그저 바람 한 점 불러다 붉은 백일홍 꽃비 뿌려 반가움을 대신하오. 내 우연히 입만 살아있는 이 말꾼과 경계를 넘나드는 연이 닿아 동지들을 이렇게 불러보니 감개가 무량하구려. 그래 요즘 경기가 불황이라더니 조선소 쇳밥은 먹을 만하오? 그대 삐걱거리는 삭신에 허허….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데 살림은 어찌 좀 촉촉하게 피셨소? 나는 아직 스물둘 꽃다운 나이 그대로건만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구려.

87년 그 뜨거웠던 봄과 여름 거제 산하 붉게 타오르던 진달래처럼 옥포만에 울려 퍼지던 북소리 함성 어제인 듯 쟁쟁한데 가슴이 아리고 답답하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치를 떨며 내 또래 박종철이 이곳으로 오던 그해 1월. 병역 특례 조건 때문에 온갖 부당 행위에도 맞서지 못하고 5년 이상 근무해야 하는 친구들이 작성한 유인물을 기숙사와 현장에 뿌리면서 노조 결성 투쟁이 시작되었지. 회사는 해고 등으로 압박했지만 여러 번 시도 끝에 노동조합이 탄생했지.

스물두 살 동갑내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이곳으로 오게 되자 온 나라가 바람 안은 들불처럼 타올라 민중의 함성으로 유월 하늘이 뒤집히고 세상이 바뀌는 듯했지. 그러나 여전히 철옹성같이 버티며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던 회사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노조 대표를 회유하는 파렴치한 짓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새로운 노조를 꾸린 우리는 길거리로 나섰고 시민과 가족들의 응원 속에 옥포와 장승포에서 차량까지 동원한 가두시위를 했다네. 연좌 농성으로 경찰과 대치하면서 진행된 여섯 번의 협상이 결렬되고 잊지 못할 그 날 8월 22일 마지막 협상마저 결렬되자 협상 장소였던 옥포 호텔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과 백골단의 폭력 진압으로 옥포 바닷가까지 밀려났다가 재차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은 폭력시위를 하지 않는다면 길을 터주겠다고 제안을 해왔어. 우리는 평화시위를 약속하고 앉은걸음으로 천천히 호텔로 향했지. 호텔이 바라보이는 옥포 사거리에 들어서자 삼면의 도로를 봉쇄하고 있던 경찰이 우리를 에워싸더니 갑자기 최루탄을 퍼붓기 시작했어. 하얀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네. 한쪽 신발이 벗겨져 두리번거리는 순간 뜨거운 감자나 얼음 덩어리를 꿀꺽 삼킨 듯 가슴이 녹아내리게 뜨겁고 숨이 막히데. 그리고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둘러업고 뛰었는데 경계가 찰나라더니 이미 나는 이곳에 와있더군.

몇 푼의 임금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염원으로 오리걸음까지 하던 자네들이 내가 이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몰려와 병원 영안실 문을 용접으로 봉쇄하고 부르짖던 절규가 아직도 최루탄 파편보다 더 깊이 박혀 있다네. "돈도 필요 없다. 이석규를 살려내라!" 내가 억겁 동안 수만 세상을 다시 나더라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우여곡절 끝에 협상이 타결되고 동지들이 뿌리는 눈물이 비로 내리는 거제를 떠났어. 광주 망월동 민주묘지에 집을 장만하고 가는 길에 내 육신을 도둑질 한 군부 독재가 고향 남원에다 강제 입주를 시키고 말았다네. 나라가 나라 위해 일어선 나라 사람 목숨 뺏은 것이 어찌 나 하나뿐이겠냐만 어찌 시신까지 탈취해서 욕을 보인단 말인가. 세월이 수십 년 흘렀으니 혹 아직 그대로는 아니겠지? 나를 기억해달라는 말은 않겠네만 나를 잊는다면 자네들은 저들이 가진 자본 일부일 뿐일 것이네. 부디 나를 잊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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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1966~1987):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진 대우조선 용접 노동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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