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 위력 무시한 안희정 판결
'남성혐오' 않고서는 살기 어려운 현실

태어나서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평생 갑의 위치에 서본 적도, 누구에게 위력을 행사할 자리에 있어본 적도 없는 나는, 위력이 갑을 관계에서 어떻게 행사되고 먹혀드는지 잘 안다고 자부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권력 관계가 돌아가야 진짜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지만, 악마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악이 무서운 건 눈앞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 무서운 건 권력자가 굳이 말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자신의 권력이 자신이 부리는 사람에게 알아서 먹혀들기 때문이다. 안 아무개가 도지사이자 차기 대권 유력주자로서 수행비서에게 위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이기는 하지만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는 위대한 결론에 이른 판사는 불행하게도 권력의 작동 방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권력은 "나, 여기 있노라"라고 하며 자신을 아랫것에게 증명해줄 필요가 없다. 그 판사는 평생 그 자신이 위력을 당할 만한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었고 위력을 행사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기에 저렇게 영양가 없는 판결이 나왔을 것이다. 그 판사처럼 많은 남자들은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하는 위력의 실체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이 폭력을 당하지 않아도 무력해질 수 있는 세상은 왕이 다스리던 때나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아서 관계해 놓고 나중에 딴 목적으로 고소한 게 아니냐고 매도한다. 이 천박한 논리는 피해자에게 안 아무개와 사귀더니 딴소리하느냐는 비난이 깔린 판사의 판결과도 일치한다.

여성의 몸을 도둑 촬영한 영상을 올리거나 불법촬영물의 소비지로 의심받는 주제에, 여자들이 애도 아닌데 성적 자결권은 어디다 처박아두고 약자라고 징징대느냐는 남자들로 만원인 딴지일보, 네이트 판, 디시인 갤러리, 엠엘비파크, 보배드림 같은 '남초' 커뮤니티나 미디어다음 같은 포털사이트 여론장에서부터 권위의 판사 말씀에 이르기까지, 온갖 '여혐'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여성의 우군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같은 여성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안 모의 무죄 판결에 혁혁히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그의 아내도, 법정에서 피해자에게 뾰족한 질문을 던졌다는 피고 측 변호사도 여성이었다. 그 자신들이 위력을 당해본 적이 없었는지 '여초' 사이트 82쿡에서는 재판 당시부터 강간이 아니고 불륜이라는 회원들의 의견이 올라왔다.

집권당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똑똑히 있긴 하지만 판사의 황당 판결을 제대로 논박한 나경원 의원과 박지원 의원이 사안에서만큼은 피해자의 동지이다. 심지어 박 대표는 워마드가 이해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가장 큰 동지는 다른 데 있었다. 그동안 워마드들에게 심리적으로 거리를 뒀던 점을 뉘우쳐야겠다. 이전 메갈리아 시절 그들이 올린 글에서 나는 저소득층 남자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폄하 의식을 읽었다. 

정문순.jpg

내게 워마드들은 잘나가는 중산층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때때로 사고를 치면 가해자와 피해자 위치를 뒤집는 미러링 전략일 뿐이라고 변호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조차 그들의 생경한 표현이 거북스럽다는 것을 구실로 외면했다. 악역은 그들이 담당하도록 내버려둔 채, 무방비로 화살을 맞는 그들 뒤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안전을 구가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남성의 위력이 여성에게 행사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남혐'이 되지 않고 살 수 있으며, 워마드를 남혐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여혐 세상에서 남혐은 무죄이고, 남혐 딱지를 피하지 않는 이들은 여성의 벗들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