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평가로 경쟁 부추기는 교육 현실
모두가 행복한 상생·협력 가르쳐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50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의 대표적인 구호다. 이후 프랑스는 교육체계와 사회문화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평등교육이 실현되면서, 거의 모든 학생이 합격하는 논술시험 '바칼로레아'만 통과하면, 집 근처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성해방·인권·공동체주의 등 진보적인 가치들이 사회에 구현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년 전 프랑스 5월 혁명 못지않은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대통령이 탄핵됐고, 정권이 교체됐다. 그리고? 혁명적으로 변한 '무엇'을 딱히 말할 게 없다. 간절하게 변하길 바라는 몇 가지를 '상상'해본다.

우리 사회에는 게임일 필요가 없는데 굳이 게임인 경우가 많다. 교육이 그렇다. 교육의 핵심적인 목표는 좋은 사회구성원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대학 이상의 고등 교육의 목표는 학문의 진전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을 깨우치면 된다.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을 평가하면 된다. 학문을 진전시켰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평가하면 된다. 절대평가를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모든 것을 상대평가 한다. 누가 누구보다 잘하는가를 평가한다. 게임이다. 게임은 법칙을 정해 승부를 내는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와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 지면 패배다. 이런 야만적인 교육 환경에서 평등, 인권, 공동체 같은 것은 패배를 부추기는 악마의 주문처럼 여겨진다. 얼마 전, 2022년 대학입시 제도를 정하는 논의가 벌어졌다. 당사자가 아니면 파악할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복잡하다. 당사자여도 깊게 공부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나아졌을까? 아니면, 나빠졌을까? 오십보백보다. 상대평가가 절대평가로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교육은 게임이다. 본연의 목표가 사라진 잔혹한 게임이다.

게임이 아닌 교육이 실현되었을 때를 상상해본다. 필요한 것을 알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된다. 모든 학생을 낙제만 안 되도록 가르친다. 시험문제를 틀리도록 내는 것이 아니라 맞힐 수 있게 낸다. 등수를 가르려니까 시험문제를 어렵게 내는 것이지, 상대평가가 사라지면 굳이 어렵게 낼 필요가 없다. 학생들도 1등이 되는 게 어렵지 낙제하지 않기는 쉽다. 수학이 쉽고, 영어가 재미있고, 국어가 행복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공무원 시험이 어렵지 않다. 소위 전문직이라고 하는 변호사, 회계사 자격증 시험도 상대평가, 경쟁이 아닌 절대평가다. 쉽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무원, 변호사, 회계사가 되기 위해 재수 삼수를 하는 수험생들은 거의 사라진다. 전문직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 지식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평가하면 되지, 경쟁자보다 한두 문제를 더 맞히는 게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전문직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그 뒤에 경쟁해도 된다. 자격증을 딸 때부터 게임을 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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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서 경쟁, 게임이 사라지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본다. 모두는 경쟁자, 적이 아니라 협력자, 친구가 된다. 나만 앞서가기 위해 상대를 자빠트리지 않고, 협력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한다. 나만 잘 살아서 '외로운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니라, 평등을 추구해 '함께 소통하는 행복'을 느낀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대립하고 혐오하는 게 아니라, 존중하고 사랑한다. '갑'과 '을'의 대립도 사라진다. 그리고, 아주 많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게임은 게임에서만 즐기자. 교육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서로를 상대로 게임하지 말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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