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어선도 다닥다닥…옹골찬 생활 터전
당산 주전골 마을 수호신 모신 언덕마을상평통보 '주전소'있던 곳
동호만 일대 바다를 메운 곳이라 '멘데' 수협건물·산단 공장 즐비

제가 지금 있는 곳은 통영시 태평동, 통제영 동쪽 담장을 따라 이어진 동네입니다. 언제부턴가 내비게이션으로 통영 강구안을 찍고 오면 꼭 이 동네를 지나게 되더군요. 통제영 뒤편으로 난 도로로 접어들자마자 충무고등학교 근처에서 왼쪽으로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세병로라는 도로인데, 굴다리를 하나 지나고 나면 내리막입니다. 어느 날 이 길을 내려오다 건너편 언덕 풍경에 사로잡혔습니다. 동피랑과 비슷하게 언덕 위에 차곡차곡 들어서 있는 자연 마을입니다.

◇통제영의 동쪽 언덕 주전골

자료를 찾아보니 마을이 있는 언덕이 태평동 당산(堂山)이군요. 마을 수호신을 모신 곳이었습니다.

"동헌에서 비스듬히 동쪽으로 길을 건너 솟은 것은 당산이다. 당산은 동헌과 건너다보이는 곳이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당산에 올라 사또에게 그 억울한 사연을 외치며 호소했던 것이다."

당산 자락은 주전골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었습니다. 통제영에서 상평통보를 만들던 주전소(鑄錢所)가 있었던 곳이라네요. 지금은 통영시 태평동에 속합니다. 주전골길, 주전1길 같은 도로명에 옛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 통제영 동쪽 당산, 옛 주전골이라 불리던 마을이다. /이서후 기자

동네를 둘러보기로 하고 도로를 따라가니 김용식·김용익기념관이 있네요. 통영에서 태어난 형제인데요. 형 김용식(1913~1995)은 외교관, 동생 김용익(1920~1995)은 소설가로 유명합니다. 기념관이지만 사실은 깔끔한 주택 건물입니다. 생가 주소에 있던 주택을 개조한 거라네요. 조촐하지만,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있네요. 내부를 둘러보다가 김용식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을 발견합니다. 와, 20년도 더 전 제가 20대 초반에 읽었던 책인데요. 느닷없이 통영에서 한창 시절의 나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네요.

주전골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두 명이 겨우 교차할 정도로 좁습니다. 골목을 빙빙 돌며 다닥다닥 붙은 삶들을 스쳐 지납니다. 구석구석 손바닥 만한 텃밭들이 끝끝내 살아온 주민들의 이력처럼 보입니다. 언덕 마을이라 골목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제법 세찹니다. 바람을 쫓아 휘적휘적 걷다 보니 통제영이 잘 보이는 곳에 지어진 정자를 만납니다. 서피랑 정상 서포루와 그 아래 간창골, 오른편으로 통제영 건물이 훤히 보입니다. 아마도 이 즈음이었겠지요. 억울한 일이 있던 백성이 통제사 나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던 곳 말입니다. 가만히 있자니 통제영에서 관광객들 소리가 들립니다.

◇강구안과 다른 동호만 풍경

"당산 옆을 빠져서 돌아가면 동문이다. 동문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수구문이 있고 수구문 주변은 장터였다. 이 두 문 밖에도 막바지는 바다였다. 그 바닷가에 멘데라는 가난한 어촌이 있어 밤낮 파도소리를 들으며 어부들은 손바닥만한 통구멩이(한둘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손질하고 어망을 깁는다. 아낙들은 생선과 해초를 모래밭에 널면서 구름을 보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가슴 죄는 하루살이 살림을 하고 있다."

멘데라는 곳을 찾아 나섭니다. 박경리가 묘사한 멘데는 현재 동호만 멸치권현망수협통영본점 근처인 것 같습니다. 옛 이름은 두룡포마을이고요, 지금은 정량동에 속합니다. 정량동의 옛 이름이 면량동인데 토박이말로 멘데, 멜양이라고 불렀답니다. 박경리는 멘데를 두고 '먼곳'이라는 뜻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머네요. 바다를 메운 곳이라는 뜻에서 멘데라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선이 가득한 동호만. /이서후 기자

지금은 매립으로 옛 모습을 거의 잃고 그저 반듯한 어항으로 변했습니다. 동호만 일대를 살펴보려고 근처 청마문학관과 통영기상대가 있는 언덕에 올라섭니다.

망일봉 자락이군요. 동호만은 수협건물들과 산업단지 공장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역시 멘데산업길, 멘데해안길 같은 도로명에 옛 지명이 남아 있네요. 근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한여름에도 긴소매 작업복을 입고 일합니다. 마침 점심때라 작업복들을 따라 낡은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널찍한 식당에는 메뉴가 따로 없습니다. 엄마 마음으로 만든 정식. 소박하고 푸짐한 반찬과 함께 나오는 밥 두 공기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한 공기를 겨우 비우는 동안, 긴 식탁을 가득 채웠던 노동자들이 어느새 다 작업장으로 돌아가고 식당이 텅 빕니다. 식당을 나서는 길 혼자 한가한 모양새를 한 것 같아 조금은 민망합니다.

근처 수협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봅니다. 이곳에서 바라본 동호항은 관광지인 강구안과 달리 거친 어선들의 세계입니다. 줄지어 다닥다닥 붙은 어선들 사이, 엔진 검은 연기를 내뿜는 다른 어선들이 입선을 하거나 출선을 하고 있습니다. 건물 입구에서 중년 사내들이 박경리가 소설에 묘사한 것처럼 그물을 손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동호항 주변은 엄혹한 생활의 터전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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