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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하천과 문화] (7) 왜적과 62대 1로 싸운 자리 작원잔도

300 조선군사, 험로 덕에 2만 왜군 버텨냈다
서울~동래 길손 묵던 시설 '작원'
낭떠러지 외길에 왜군 진격 막혀
조선인 여러 날 점거해 막아낸 곳
침략-방어 부딪친 '전략 요충지'
밀양 사람들, 작원관전투로 일러
당시 의기 기리며 위령탑도 세워
좁은 길 내는 데 흘린 피땀 느껴져

공동취재팀 pole@idomin.com 2018년 08월 17일 금요일

앞서 창녕 남지와 함안 칠서·칠북 일대 낙동강은 임진왜란을 겪은 영웅과 선비들이 장하게 뱃놀이를 한 자리라고 일렀다. 남강이 낙동강에 합해지는 용화산에서 곽재우 장군이 말년을 지낸 망우당이 있는 창암에 이르기까지다. 용화산이 마주 보이는 기강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 승전지이기도 하다. 거기서 하류 쪽으로 내려서면 곧장 삼랑진이 나온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밀양강을 받아들인 직후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군의 진격을 제대로 막은 첫 자리 작원

삼랑진 검세리에 '작원(鵲院)' 마을이 있다. 강변인데 스무 집 안팎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근처에 있었던 국립 여관 이름이 작원이다. 옛날 여기를 지나 서울과 동래를 잇는 도로를 동래로라 일렀다. 작원은 말하자면 동래로 길목에서 벼슬아치를 비롯한 길손들이 묵을 수 있도록 마련한 시설이었다. 아울러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투다운 전투가 처음 치러진 전적지이기도 하다.

작원잔도.

왜군은 4월 13일 동래성과 부산진성을 깨뜨리고는 곧바로 김해·양산·울산 세 갈래로 북진했다. 김해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고 울산서는 그런 전투조차 없었지만 양산을 지난 밀양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삼랑진 작원은 양산을 거쳐온 왜군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여기를 밀양부사 박진이 군대를 거느리고 지켰다. <선조수정실록> 4월 14일 자에 나온다. "작원 좁은 잔교(棧橋)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왜적이 여러 날 진격할 수 없었다. 적병이 양산을 함락하고 뒤로 돌아서 쳐들어오니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정확히 며칠이라 특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진격을 가로막고 24시간 넘게 버틴 최초 전투였다.

밀양 사람들은 작원관전투라 이르면서 크게 기린다. 밀양시청은 2001년 작원 마을 가까운 산기슭에 '작원관위령탑'을 세웠다. 비문에서 "군세는 미약하고 용력이 다하여 마침내 왜적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으니 그 안타깝고 억울함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했다. "한 번 죽음으로 쓰러지는 나라를 떠받치니/ 그 의기 천하에 높아 장부의 가슴을 떨어 울렸다/ 언제 공명을 생각했던가! 마음속엔 가국(家國)의 안위뿐이네/ 후인들이 그 정신 높이 받으니 지나는 이 반드시 옷깃을 여밀지라"는 끝에 붙인 시문이다. 조선 군사는 고작 300명, 적병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 1만 8700명이었다.

작원관위령탑.

◇전통시대 최고 험로 작원잔도

300 대 1만 8700으로 싸워 다만 며칠이라도 막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동국여지승람>에 답이 나온다. '밀양도호부'의 '작원' 조에 있다. "작원에서 남쪽 5~6리에 낭떠러지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하다. 한 굽이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다. 내려다보면 천 길로 물이 짙은 푸른 빛이다.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워하며 걸어간다. 예전에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원추암(員墜巖)이라 한다." 작원잔도가 있었기에 60배도 넘는 대적과 맞설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이야 다른 데로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어림없는 소리였다. 부산에서 밀양·청도·창녕·현풍으로 들어가는 하나뿐인 통로였다. 서쪽은 낙동강에 막혀 있고 동쪽은 백두대간 험한 산악이라 대체 교통로를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왜적은 여기 고을들을 손아귀에 넣어야 했다. 그때는 전투가 곧 보급이었다. 싸워서 이겨 고을을 차지해야 약탈을 할 수 있고 약탈로 배를 채워야 전투든 전진이든 할 수 있었다. 작원잔도는 침략과 방어가 필연으로 맞부딪치는 전략 요충이었다.

작원관위령탑 자리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하류 방향. 왼편에 경부선 터널이 보인다.

일제는 1905년 개통한 경부선 철도를 만들면서 동래로를 덮어썼다. 그렇지만 작원잔도는 살아남았다. 현장에 가면 까닭이 보인다. 작원마을에서 굴다리를 지나 자전거길을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 1㎞ 남짓 지점에 나타난다. 잔도는 원래 길이 아닌 데에 낸 길이다. 70~80도로 비탈진 바위 벼랑이다. 먼저 아래에 네모지게 다듬은 바위를 기둥 삼아 세로로 받친 다음 그 위에 길게 다듬은 바위를 들보처럼 가로로 얹었다. 그러고는 들보 위에 직각으로 어긋지게 위에 1m 정도 길이 바위를 깔았는데 너비는 둘이 지나면 어깨가 마주칠 정도다. 둘레 자연암반에는 옛사람들이 정으로 돌을 쪼아낸 자취도 있다. 좁은 길 한 줄기를 내기 위하여 흘린 피땀이 거기에 어려 있다.

바로 위 철도는 잔도에 해당되는 구간이 터널이다. 잔도가 강변 가파른 벼랑에 붙어 있다 보니 덮어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천연암반에 굴을 뚫어 철도를 깔았다. 양산 쪽에서 터널을 지나 밀양 쪽으로 들면 오른편에 높이가 30m 넘는 수직 절벽이 눈에 띈다. 대부분을 콘크리트로 쳐서 발랐는데 큼직한 돌멩이가 빽빽하게 박혀 있고 위쪽에는 비석 모양으로 움푹 판 데도 있다. 돌이 떨어져 내리지 않도록 방지하는 목적이겠다. 1900년대 조선 백성들이 일제 식민지 수탈에 동원되어 피땀을 흘렸던 물증이다. 아래서 위로 4분의1쯤 지점에도 콘크리트가 붙어 있는데 돌멩이가 박혀 있지 않고 가운데는 글씨가 쓰여 있었음직한 자취가 있다.

작원잔도 위편 경부선 철길에 있는 수직 절벽. 콘크리트로 발라놓았다.

작원을 지키는 방비 요새 작원관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싸우던 박진 군대를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단지 "잔교를 지켰다"고만 했다. 작원관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이다. 훨씬 늦은 <순조실록> 1811년 3월 30일 자 기사는 이렇다. "작원은 하늘이 내린 요새로 실로 관방(關防)을 설치해야 할 지역(固是設防之地)"이라며 "사정이 조금 넉넉해지기를 천천히 기다려 다시 진지하게 의논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그 뒤 어느 시기에 임진왜란을 교훈 삼아 작원관을 세웠다고 보면 맞겠다. 지금 작원 마을 가까이 있는 작원관은 1995년 밀양시청이 세운 것이다. 원래 작원관은 지금 자리에서 하류쪽으로 1.2km 지점에 있었는데 1936년 7월 대홍수로 사라졌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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