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생가로 향하는 입구 담벼락 적힌 시구 눈에 띄어
충렬사 맞은편 동네 인상적…소설 연계한 관광지로 변신
백석이 반한 '난'살던 명정골, 옛사람들·정취 절로 느껴져

지금 제가 있는 곳은 통영 서피랑입니다. 요즘 날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죠. 서피랑 정상에 올라 통제영을 바라보면 이 일대가 훤히 보입니다.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이 묘사한 통제영의 서쪽 간창골도 바로 이 풍경 안에 있습니다.

"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는 한량들이 노는 활터가 있고, 이월 풍신제를 올리는 뚝지가 있다. 그러니까 안뒤산과 뚝지 사이의 계곡이 간창골인 셈이다."

안뒤산은 지금 여황산입니다. 뚝지는 지금 서피랑 주변이죠. 그러니 간창골은 통제영과 서피랑 사이를 이릅니다. 지금은 통영문화원 앞으로 난 간창골 1, 2길 도로명으로 그 흔적이 남았습니다. 통제영에서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서피랑 북쪽 자락에 통영문화동배수시설이라 불리는 근대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1933년에 만들어진 당시 최첨단 상수도시설이랍니다. 민족혼을 말살하겠다고, 통제영 사당이 있던 곳에 지었다는군요. 그래서 어쩐지 무언가 심술궂고 고집 세게 틀어 앉은 건물입니다.

박경리 생가 주변 골목. 정면으로 가면 박경리 생가, 오른쪽으로 가면 서문고개가 나온다. /이서후 기자

이 건물을 바라보며 길을 내려오면 박경리 생가가 있는 동네가 나옵니다. 서피랑 자락과 이어진 언덕 위에 들어선 조그마한 동네입니다. 도로명으로 통영시 충렬1길에 속하네요. 첫 골목이 박경리 생가로 이어진 길입니다. 정확하게는 박경리 생가 자리라고 해야겠네요. 지금은 벽돌 주택으로 일반 가정집이니까요. 생가로 가는 골목 입구 담벼락에 시가 그려져 있어 금방 알아볼 겁니다. 푸른색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축복받은 사람들'이란 시입니다. 담 모서리 적절히 걸친 시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제가 통영에서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오밀조밀한 골목 자체도 '사랑은 가난한 사람이 한다'는 시구와 잘 어울립니다. 이 골목 주변에 서문고개가 있었습니다.

"간창골에서 얼마를 가파롭게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 그곳을 일컬어 서문고개라 한다. 서문 밖에서 안뒤산의 한 줄기인 뒷당산이 있는데, 그 뒷당산 우거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자리잡고 있다."

박경리 생가를 지나 왼편으로 꺾어 올라가면 서문고개 안내판과 성곽 일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르는 길에 몸이 아주 불편하신 어르신을 잡아 드렸습니다. 평생 오르내렸을 서문고개일 테지요. 어르신은 고맙다는 말을 건네시고 저물어 노릇해진 햇살 아래, 대문 안으로 스르르 사라집니다. 매일 틀림없이 해가 지듯이 누구나 저무는 시절이 오기 마련이지요. 쓸쓸한 마음으로 한참을 서문고개 성곽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도로 건너 큰 주차장과 함께 보이는 곳이 충렬사입니다.

"이 일대는 이곳의 성지라 할 만한 지역이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충렬사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아름드리 동백나무는 찾지 못했습니다. 충렬사 맞은편 동네는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배경이기도 합니다. 동네 안에 소설 속 악역 정국주의 어머니 하동댁이 살던 기와집이 있습니다. '하동집'이라고 지금은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이곳 말고도 동네 자체가 아예 소설과 연계한 관광지로 꾸며졌습니다. 동네 지도가 그려진 푸른 담벼락이 인상적이네요. 살살 걷다 보니 동네가 조용하군요. 심심한 강아지 한 마리가 담장 너머 저를 향해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듭니다.

동네를 지나면 큰 교차로입니다. 교차로 한편에 시인 백석의 시비가 있습니다. 그는 '난'이라는 여성에 반해 몇 번이나 통영을 찾았죠. 난이 살던 동네가 명정골입니다. 명정(明井)이란 우물이 있는 동네입니다. 명정은 백석 시비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있습니다. 도로 아래 움푹 낮은 곳에 우물이 두 개 보일 겁니다. 1670년에 팠다는데, 하나는 일(日)정, 또 하나는 월(月)정입니다. 두 한자를 합치면 명(明)이 되죠. 충렬사를 다르게는 정당(正堂)이라고 했기에 정당샘이라고도 불리던 우물입니다. 같은 물줄기겠지만, 일정에서 나오는 물은 충렬사에서 이순신 장군 제사를 지낼 때 쓰고, 주민들은 월정에서만 물을 길어다 썼습니다. 우물에서 연결된 수로가 넓은데, 사람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했습니다. 수로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비칩니다. 그 하늘을 보며 충렬사 계단에 앉아 이곳을 바라보면서 시를 적어 내려가던 백석을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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