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한계 넘어 다양한 역할, 국내서도 활동 범위 확대 기대

<원펀맨>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사이타마입니다. 사이타마는 그간 다른 히어로가 보여준 모습과는 아주 딴판입니다. 보통 히어로물은 주인공이 자신보다 강력한 빌런(악당)과 대결하면서 성장하는 구도입니다. 그런데 사이타마는 한 방이면 어떤 강력한 적이든 끝을 냅니다. 단 한 방에 말이죠.

악당이 나타나면 다른 여러 히어로가 애를 먹고, 늦게 등장한 사이타마가 한 방에 적을 날려버리는 구성이 전반적인 <원펀맨> 모습입니다.

독특한 구성 덕분에 많은 인기를 끄는 이 만화에 제가 주목한 까닭은 따로 있습니다. 사이타마가 대머리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사이타마도 처음부터 대머리는 아니었습니다. 구직활동을 하다 우연히 소년을 죽이려는 괴인을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괴인을 물리친 사이타마는 어릴 때 자신이 히어로를 꿈꿨다는 사실을 기억해냅니다. 그때부터 구직활동을 포기하고 히어로가 되고자 3년 동안 훈련을 거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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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높은 훈련의 결과로 사이타마는 엄청난 힘을 얻지만 반대급부로 머리카락을 잃죠. 대머리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라는 점이 <원펀맨>의 매력 하나입니다.

만화 속 인물 중 매력적인 대머리, 민머리는 또 누가 있을까요? 원펀맨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슈퍼맨의 영원한 숙적, 렉스 루터를 꼽겠습니다. 원래 렉스 루터는 빨간 머리 과학자 설정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머리로 고착했습니다. 무려 1940년 처음 등장했으니 대머리 악당의 대선배인 셈입니다.

가장 대중적인 렉스 루터의 설정은 가난하게 태어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도 보였죠. 스스로 가장 뛰어난 인간이라고 믿었던 그는 슈퍼맨이라는 난데없는 초인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낍니다.

더욱이 자신을 칭송하던 사람들이 슈퍼맨에 집중하자 배신감을 느꼈고, 복합적인 감정의 끝은 슈퍼맨을 향한 집착과 분노였습니다. 그렇게 매력적인 대머리 악당이 탄생했습니다.

슈퍼맨을 다룬 실사 영화에서도 렉스 루터 역을 맡은 배우는 대부분 대머리로 등장합니다. 최근 슈퍼맨 영화 작품에서 렉스 루터를 맡은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도 처음에는 장발이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민머리로 모습을 바꿉니다.

미국 코믹스 양대 산맥 하나인 DC 코믹스에 대머리 악당 렉스 루터가 있다면, 또 다른 축인 마블 코믹스에는 엑스맨 설립자이자 뮤턴트(돌연변이)의 대머리 구원자 프로페서 엑스가 있겠습니다.

염동력과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을 지닌 그는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에 부작용을 겪어 대머리가 됐습니다. <원펀맨> 주인공 사이타마와 유사한 흐름입니다.

렉스 루터나 프로페서 엑스 두 인물 모두 대머리가 아니면 이상할 정도로 이제는 그 이미지가 고착했습니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프로페서 엑스 역을 맡은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는 실제 대머리입니다.

그는 10대 때부터 머리카락이 빠져 배우를 하기에는 제약이 있었고, 외모에 자신감을 잃었지만 빼어난 연기력으로 극복한 사례입니다. 대영제국 훈장을 받기도 했고요.

만화 속 프로페서 엑스 외모는 실제 배우 모습에서 빌렸습니다. 바로 영화 <왕과 나>로 제2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율 브리너입니다.

패트릭 스튜어트가 토로했듯 매끈한 머리는 배역이 한정적인 까닭에 배우에게는 약점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율 브리너는 여러 작품에서 당당하게 주연을 꿰찼고, 특유의 카리스마와 빼어난 연기력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쉽게 민머리, 대머리 주연 배우를 목격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브루스 윌리스, 제이슨 스타뎀, 빈 디젤, 드웨인 존슨이 있겠습니다. 이들은 대머리, 민머리를 단점이 아닌 개성으로 살려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대중문화에서 대머리는 여전히 소수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남성이 탈모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말이죠. 지난해 독일 샴푸 제조사 닥터볼프 알페신이 닐슨코리아에 의뢰한 설문 조사에서 25~45세 한국인 남성 801명 가운데 47%가 탈모로 고통받는다고 답했습니다.

소수자 집단이 있다는 것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소유한 지배 집단이 있다는 뜻입니다. 모발이 풍성한 사람들이 곧 지배 집단입니다.

실제 웬만한 한국 드라마·영화·예능에서 대머리를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도 모발이 풍성한 주인공이 우세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빈도가 매우 낮습니다. 민머리조차 접하기 어렵습니다. 방송인 홍석천 같은 경우가 간혹 있지만요.

그런 점에서 배우 김광규 활약에 눈길이 쏠립니다. 김광규는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 이미 탈모가 완전히 진행됐다고 합니다.

가발을 쓰고 활동을 한 적도 있지만 배역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가발을 벗자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영화 <친구>에서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대사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후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배우 김광규만의 연기를 대중에게 각인했습니다. 요즘은 활동 반경을 넓혀 예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소수자 집단인 여성이 중심 주인공을 맡거나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는 요즘 대중문화 경향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대머리, 민머리가 한국 대중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조명을 받는 일도 머지않아 보입니다. /최환석 기자 che@idomin.com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로 활약하고 있는 대머리 배우들. 왼쪽부터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제이슨 스타뎀,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프로페서 엑스 역을 맡은 패트릭 스튜어트, 만화 <원펀맨> 주인공 사이타마, 영화 <황야의 7인> 율 브리너, 영화 <보안관>에 출연한 김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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