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생존과 문명 이끈 능력은 허구
사이버물리시스템 4차 산업혁명 핵심

10만 년 전 지구상에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르가스터, 호모 루돌펜시스 등 최소 여섯 가지 인간 종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존재하는 종은 '호모 사피엔스'뿐이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이룩해 왔을까?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다른 종과 달리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차별화된 언어와 인지능력은 사피엔스만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한다. 세상에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믿는 능력은 신화·종교·국가·민족을 등장시켰다. 이렇듯 허구를 통한 집단적 상상은 동질감으로 사피엔스들을 협력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침팬지, 원숭이들도 무리를 이루며 협력할 수 있지만, 그 무리는 20~50여 마리에 불과하다. 이 숫자를 훌쩍 넘은 수많은 무리가 기업·도시·국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공통의 허구를 믿기 때문이다. 같은 신화에 기반한 국가의 일원이라서, 같은 신념을 믿는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생면부지의 사람과 협력하고 질서를 유지한다.

특히 오늘날 기업의 임직원은 법적인 허구인 기업 법인을 만들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한다. 알고 보면 기업은 물리적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상상의 조직에 불과하다. 이처럼 '가상의 실재'를 창조하는 사피엔스의 능력은 수많은 사람이 결속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이 사피엔스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가상의 실재를 창조하는 능력은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들면서 더 중요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가상의 세계와 물리적 실재가 연동된 '사이버물리시스템(Cyber-Physical Systems)'의 구현이다. 가상의 영역에 속하는 컴퓨팅·통신·제어를 실제 물리적 세계와 통합하는 것이다.

사이버물리시스템의 대표적인 사례인 스마트팩토리는 디지털 자동화기술·정보통신기술 등 가상을 구현하는 기술을 설계·개발·제조·물류 등 실재의 제조과정에 적용한 것이다. 가상과 실재의 통합을 통해 개개인에게 꼭 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더 값싸고, 신속하게 제공하는 지능형 생산 공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 가상화폐를 들 수 있다. 가상화폐는 우리가 쓰는 돈처럼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 사용료를 결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실재가 없이 온라인에 떠도는 코드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허구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이 믿고 사용한다.

이처럼 세상은 갈수록 가상과 실재가 혼재한다. 가상과 실재를 억지로 구별하려 하지도 않고, 구별할 수도 없게 되어가고 있다. 가상이 없는 실재를 상상할 수 없고, 실재를 뒷받침하는 게 가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더 정교한 허구들로 만들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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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볼 때, 10만 년 전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인지혁명을 통해 문명을 지탱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듯이, 4차 산업혁명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인류는 정보통신·인공지능·빅데이터·사물인터넷 기술로 더 완전한 가상세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상세계를 실재화·통합화하는 능력을 지닌 집단이 미래를 지배할 것은 역사적으로 자명하다. 즉, 새로운 허구의 등장이 혁명의 시작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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