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경남도민일보에 매주 연재되고 있는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의 '할매열전'을 관심 깊게 읽고 있습니다. 주로 70대~80대 할머니들이 억척같이 살아온 삶을 소개하는 글인데요. 읽을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아려오곤 합니다. 어쩌면 이들 할머니야말로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해야 할 처지에 놓인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약자가 아닐까 합니다.

문득 10년도 더 지난 일이 떠오릅니다. 어릴 적에 4학년 때까지 제가 다녔던 고향 남해의 국민학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른들의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매년 추석 연휴 기간을 이용해 그 학교 동창회가 기수별로 주관해 체육대회를 열어왔는데, 그해에는 우리 기수가 주관하는 순서였습니다.

체육대회는 그 학교 학군 내에 있는 마을별 대항으로 진행되었는데요. 학교를 졸업한 동문뿐 아니라 학군 내 마을에 사는 모든 주민이 참여대상이었고, 팀도 마을별로 구성되었습니다. 운동장에는 마을별 천막이 설치되고 막걸리와 각종 음식이 준비되었는데, 거기에 드는 비용은 주관하는 기수의 동문회가 마련해 각 마을별로 얼마씩 지원하는 식이었습니다.

일생에 한 번 또는 많아야 두 번 정도 돌아오는 부담이어서 해당 기수의 동문은 제법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했지만 크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막상 체육대회 행사에 가보니 주관하는 우리 기수는 그냥 돈만 내는 역할이었고, 실제 행사의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은 총동문회장과 간부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좀 있다 시작된 '개회식'이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총동문회 측은 연단에 동창회장과 면장, 농협 조합장, 군의원 등 소위 지역유지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참석한 선수와 주민들은 마을별로 1열 종대로 줄을 세워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줄지어 선 주민들은 대부분 70대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죠. 가을 땡볕에 노인들을 그런 자세로 서 있게 하는 건 영 아니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동창회장의 개회사 연설은 지루하고 따분했습니다. 많아봤자 50대인 그가 어른들을 세워놓은 채 거들먹거리며 '가오'를 잡는 것도 비위가 상했습니다. 참석한 유지들도 일일이 축사를 시킬 태세였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내가 참지 못하고 대열의 앞으로 나갔죠. 그리고 서 있는 선수와 주민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자~! 앉읍시다. 앉아요. 앉으세요. 앉으세요."

그랬더니 처음엔 쭈뼛쭈뼛하던 주민들이 엉거주춤 서 있던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행히 운동장은 잔디 구장이었고, 총동문회 측에서도 처음엔 당황하는 듯하더니 따로 뭐라 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지역유지들의 지루한 축사가 이어지긴 했지만, 참석자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서 개회식을 마칠 수 있었죠.

그런데 개회식이 끝나고 운동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는 순간 놀라운 풍경이 드러났습니다. 할머니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영락없이 잡초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던 겁니다. 할머니들이 밭매기를 하던 습성으로 잔디 사이에 자라난 잡초들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앉은 상태에서 자리를 조금씩 이동까지 해가며 눈에 보이는 잡초를 모조리 뽑아 더미를 쌓은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의 놀라운 풀매기 본능'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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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일밖에 모르고 시부모와 남편,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이 땅의 할머니들. 앞에서 소개한 마을 대항 체육대회에서조차 젊은 유지들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땡볕에 도열해야 하는 할머니들. 여태껏 우리는 이들 할머니 세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할매열전'의 기록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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