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죽음으로 한발 다가서는 일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길

연일 폭염이 계속된다. 더워도 너무 덥다. 꼭 더위 탓만은 아니지만, 이 와중에 이승을 떠난 분들이 참 많다. 개인적으로 지난달에는 1주일에 한두 번은 이승 떠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대부분 직장 동료나 친구들의 부모상(父母喪)이었지만,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던 학자와 시인, 정치인과 민주화운동가도 있었다.

특히, 30년 넘도록 내 마음속 스승이었던 시인 박노정 선생님을 황망히 떠나보내고 삶의 무상함에 젖어있을 때, 노회찬 국회의원의 청천벽력같은 부음(訃音)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너무나 안타까워 말을 삼가고 며칠째 가슴으로만 울었다. 이후 '죽음'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래,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는 것이지!""모멘토 모리!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인 모리 교수 말대로, 우리들 인생이란 양쪽 어깨에 '삶'과 '죽음'을 나란히 짊어지고 가는 것. 삶과 죽음은 늘 동전의 앞뒷면처럼 한 몸에 있다. 죽음을 사유하라!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마라!

"죽음은 생명을 끝내지만 관계까지 끝내는 건 아니다."

역시 모리 교수의 말이다. 그렇다. 앞서 떠난 사람들의 죽음은 오늘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관계'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게 한다.

한 그루 '큰 나무'처럼 계셨던 선생님을 하루아침에 화장(火葬)했다. 육신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몇 줌의 재로 갈아서 나무상자에 담았다. 선생님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작은 배롱나무 밑을 얕게 파서 한 줌씩 재를 뿌리고 흙을 덮어 묻어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아득하고 멀기만 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속절없이 묻고 되물었다.

남은 생애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까. 아직 양가의 부모 형제들은 다 무고하다. 가까운 친척과 선후배 동료 벗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학부모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때가 되면 모두 이승을 떠나야 한다. 다만 우리는 누가 먼저,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를 뿐이다. 죽음은 어길 수 없는 천명이다.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우리는 어느 날 훌쩍 떠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는 돈, 권력, 명예도 다 덧없다. 생명 가진 모든 존재는 오직 죽음 앞에서만 온전히 평등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두 질문은 결국 같은 질문이다. 시시때때로 죽음을 사유하는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을 간절하고 절실하게 살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이승의 순례 길에서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며 천지신명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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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제 몸과 영혼은 오직 '사랑'으로 빚은 '생명'임을 믿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온 생명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앞서 떠난 사람들의 아름다운 꿈을 이어 오늘보다 내일은 더 '맑고 밝고 따뜻한 세상'이 되게 하소서! 저의 무지와 탐욕으로 사랑을 거스른 일들은 부디 용서해 주소서! 아직도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열정과 사랑, 오늘 하루 온전히 다 태워 한 줌 재로 남게 하소서! 사랑했기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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