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할 때 자유롭게 생물학적 변화와 성전환을 할 수 있는 권리, 자유롭게 옷을 입고 치장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 미국 동성애자 해방운동 대표단이 내걸었던 요구다.

2018년 7월 1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뜨거운(?) 행사가 치러졌다. 주최 측 추산 12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기록된 제19회 서울 퀴어문화축제다. 서울의 중심부인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행사를 치른 것이 이번이 세 번째인 데다, 매년 참가인원 기록도 갱신하고 있으니 외견상 축제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대 여론은 여전했다. 축제 단골손님인 반동성애 개신교 단체가 출동했으며, 성소수자들이 노출 퍼레이드를 벌이고 성 관련 기구들을 현장에서 판매한다는 점 때문에 일부 학부모 단체도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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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상징깃발(Pride Flag)로 사용하는 6색의 무지개 깃발(Rainbow Flag).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는 성소수자들은 이에 대해 "사회에서 억압받는 이들이 축제에서만큼은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며 "보기 거북하고 불편하다는 반응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주눅 들지 않는 답변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2018년 한국 사회는 분명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음지에 숨어있던 동성애가 광장으로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성과 관련한 금기 중 동성애와 근친상간은 인류역사와 오롯이 그 궤를 같이한다. 그래서 시대마다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강도(强度)가 줄어들었을 뿐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근대에 들어 동성애가 금기시된 것은 '호르몬 부조화나 유전자 이상으로 생긴 질병'이라는 의학적 관점, 성 심리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정상적 갈등의 결과'라는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적 관점 때문이다. 한마디로 '비정상 또라이'라는 말이다. 동성애자들은 또 양성을 구별하고 양성 결합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는 사회규범 체계를 허물어뜨린 '반(半)음양인'이었기에 늘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동성애란 열쇠말로 찾아본 그 역사는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공식적인 비정상 판정을 받기 전까지 동성애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그 시원(始原)인 고대 그리스는 동성애가 만개했던 때다. 상대는 장년 남자와 미소년. 학문이나 기술이 무르익어 절정에 이른 장년이 이제 막 그런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 소년을 애정을 가지고 가르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숭고한(?) 목적 아래 이뤄지던 교제에 성행위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 건 불문가지. 후대 학자들은 많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신화에 의거해 남색(男色·Sodomy)을 장려하고 권장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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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500년경 그리스의 도기 장식화.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로마에서는 기원후 3세기까지 동성애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성애를 엄격하게 금지하던 유대 전통이 기독교로 전해져, 본격적인 기독교 시대가 열리자 남색, 혹은 동성애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 되었다.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철학자 필론은 소돔의 죄악에 대해 논하면서 소돔 사람들이 불 세례를 받아 멸망하게 된 까닭은 동성애 때문이었다고 해석했다. 이 해석은 초기 기독교 교부(敎父)들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며, 교회는 4세기 초부터 동성애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자 반전이 일어난다.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그때까지 은밀하게 이어지던 동성애가 다시 바깥으로 머리를 내민 것이다. 특히 성공한 장년 남자가 유망한 젊은이를 애인으로 삼고 사랑과 학문을 전수하던 고대 그리스 전통이 '르네상스 복고풍'에 힘입어 부활했다. <데카메론>을 쓴 복카치오는 "학자란 곧 남색가"라고 말했는가 하면, 인문학자 아레티노는 "남색은 중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시대가 르네상스기라고는 하나 지금 들어도 파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식이 일반화되고 이성주의가 대세가 되자 유럽에서 동성애는 다시 파렴치한 죄악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까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동성애에 부과되는 형벌은 사형이었다. 영국 역시 1861년까지 사형제를 고수했다. 17세기 신대륙 해안 식민지에서는 '자신의 씨를 서로 간에 낭비하다가' 잡힌 남자들이 교수형을 당하곤 했다.

일본 에도시대에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기와 비슷한 동성애 풍조가 일반적이었으나 좀 더 노골적이었다. 장년 남자와 그가 선택한 미소년은 마치 부부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부부 사이에 생길 법한 온갖 애증(愛憎)이 수많은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 당시를 묘사한 멋진(?) 문장이 있다. "뼈대 있는 무사들은 다른 사람이 남색 대상을 채가기라도 하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였다.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는 건 용인해도, 미소년을 뺏기는 건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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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화가 미야가와 초슌(1682~1752)의 난쇼쿠(남색·男色) 춘화.

퀴어축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용인되듯 동성애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이제 '절대 금기'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옮겨온 듯하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근대에 확립된 비정상이란 정의(定意)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1948년에 발간된 <킨제이 보고서>로 유명한 미국의 동물학자 알프레드 킨제이는 당시 미국 여성의 2% 및 남성의 4% 정도는 완전한 동성애자이고, 남성의 13%는 최소한 일생동안 3년은 동성애에 빠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동성애가 비정상 질환이 아니라는 말이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동성애자들을 비난해온 이들을 '서구 문화의 도덕적 파수꾼'이라고 지칭하면서 그 연원을 이렇게 살핀다.

"유대-기독교 원리는 반복되는 영토 정복을 통해 강화된, 급속하고 순조로운 인구 증가를 밑거름 삼아 성공한 '공격적인' 유목 민족의 예언자들이 쓴 구약성경에 토대를 두고 있다. <레위기>에 '너는 여자와 하듯이 남자와 잠자지 말라. 그것은 혐오스러운 짓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논리는 인구 증가가 최우선 과제일 때 통용되던 자연법 관점과 일치한다. 그런 환경에서 성행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지금 그들의 인구학적 목표가 초기 유대인들의 그것과 전혀 다름에도 여전히 그 고대규정을 따르고 있다. 그 논거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근본적으로 이상 성격자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후 '친족 선택 가설'이란 이론을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동성애가 생물학적 의미에서 정상일 뿐 아니라 초기 인류 사회 조직의 중요한 요소로서 진화해 온 독특한 자선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싶다. 동성애자들은 인류의 진귀한 이타적 충동 중 일부를 운반하는 유전자 담체(擔體)일지 모른다."

요약해서 말하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대신 친족 아이들을 살폈기에 동성애자들은 혈연집단에 필요한 존재였고, 그래서 동족들이 일부 공유했던 그런 유전자가 계속 살아남았다는 가설이다. 물론 이 가설은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이처럼 동성애를 정상으로 여기는 학문적 성과가 줄을 이으면서 동성애는 일부 반대론자들에게 혐오의 대상일지언정, 더 이상 우리 사회를 갉아먹는 괴기스런 존재는 아니게 됐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 동성애가 비교적 단순한 논점으로 다뤄지고 있는 것에 반해 근친상간은 근친혼이라는 제도적 문제와 결부돼 훨씬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동성불혼이라는 중국 논리가 들어오기 전 신라에서는 널리 알려진 대로 근친혼이 크게 유행했다. <신당서>에는 "형제의 딸이나 고모 이모 종자매를 다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 왕족은 제1골(성골)이며 아내도 역시 그 족속으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또 제1골은 제2골(진골) 여자에게 장가가지 않으며 가더라도 언제나 (2골 여자를) 첩으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다.

법흥왕의 딸은 삼촌인 입종의 부인이 되었고, 진흥왕의 아들 동륜은 고모와,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은 5촌 질녀와 결혼했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금수와 같다고 하겠으나, 당시 신국(神國)을 자처하던 신라왕실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려시대 왕실에서는 63건의 동족혼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8촌 이내 근친혼이 70%에 달하며 이복형제자매간 혼인도 10건이나 된다. 고려 중기 외척이었던 이자겸은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셋째와 넷째 딸을 그 아들 인종의 왕비로 바쳤다. 자매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되고 같은 남편을 섬기는 왕비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도 신라 근친혼을 두둔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흉노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아내를 차지하는 풍습이 있다며 신라 근친혼은 이보다는 심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근친상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지금으로선 확실하게 입증된 과학적 사실이다. 유전학자들이 행한 연구결과를 보면 그리 심하지 않은 수준의 근친상간에서도 전반적으로 몸집, 근육 조화, 학업 수행능력 등이 뒤떨어지는 아이들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 형제의 아들과 성관계를 맺은(강한 근친상간) 체코 여성들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태어난 161명의 아이들 중 15명은 사산했거나, 생후 1년 이내에 죽었으며 40% 이상은 심한 정신 장애, 왜소증, 심장과 뇌 기형, 농아, 결장 확장, 요도 이상 등 다양한 신체 및 정신적 장애로 고통받아야 했다. 반면 같은 여성들이 비근친 성관계를 맺어 출산한 95명의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다른 집단만큼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역사상 있었던 수천 종류의 사회 중에서 유전학 지식을 보유한 것은 최근 몇몇 사회뿐이다. 비록 유전적 위험성을 짐작하고 있었더라도 각 사회가 근친상간이 초래할 파괴적인 영향을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근친상간은 그토록 강력한 금기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 신라와 고려왕족 사회를 보면 근친상간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인류학자 라이오넬 타이거와 로빈 폭스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형태의 강력한 결합 관계가 형성되면 그들이 다른 형태의 결합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고 한다. 교사와 학생은 학생이 스승을 능가하는 성취를 이뤄도 동료가 되기 어렵다. 엄마와 딸은 시간이 흘러도 원래 지녔던 감정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한다. 부녀, 모자, 형제, 자매는 일차 결합이 거의 모든 것을 배제한다. 두 사람은 그래서 근친상간 금기가 인류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웨스터마크' 효과도 이와 비슷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가 초반에 걸쳐 활약한 스웨덴 사회학자 에드워드 웨스터마크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근친 간에는 이성적인 감정이나 성욕이 생길 수 없다고 보았다. 거센 반론을 받긴 했지만 이스라엘 키부츠 사례(협동동장에서 함께 자란 아이들이 결혼 관계에 이르지 못한 것)나 대만의 민며느리 사례(어릴 때 데려와 남자와 함께 키운 여자가 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이혼율이 높았다는 사실)는 이런 사실을 일부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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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의 작품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이집트 왕가의 근친 결혼 풍습에 따라 남동생인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다.

반면 다른 문화인류학자 그룹은 '금기를 넘보는' 인간의 본성인 성 충동이 그렇게 쉽게 사그라들 리 없다며 '부족 간 교환 이론'을 제기한다. 고대 부족사회에서 다른 부족과 통혼하는 '족외혼(族外婚)'을 한 부족은 강력한 우군을 얻었던 데 반해, '족내혼(族內婚)'은 그렇지 못했기에 족외혼이 대세가 되고 그 매개체인 여성을 건드리는 일은 금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스먼드 모리스는 "근친상간 금기는 족외혼이 주는 제약이란 의미를 함축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오래전에 생물학적으로 발달한 현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전통적인 번식체계는 영장류와 같은 행동양식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근친상간 금기를 더듬어 가다 보면 신라나 고려 왕실을 비롯해 동서양 왕족들의 근친결합이 매우 특수한 예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대영제국 황금기를 장식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사촌인 앨버트와 결혼했으며, 2차 대전을 일으킨 일왕 히로히토도 사촌인 나가코와 결혼했다. 심지어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세 살 어린 이복동생과 부부가 되었다.

인류의 보편적 번식 체계와 금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이들이 근친혼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위신과 재산, 그리고 권력 때문이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근친혼을 통해 가문이 소유한 부동산, 현금, 보석 등의 재산과 정치사회적 자산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자겸이 딸들을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로 만든, '경악할만한 공작(工作)'은 평생 권력을 보장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집트 같은 극단적인 곳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파라오의 고결함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권력 및 재산을 온전히 지키려면 유전병 따위를 겁내서는 안 된다!" 근친혼으로 유전 질환이 계속 나타나는데도 전통을 버리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청나라 또한 만주족의 정통성을 고수한다며 '부사취모(父死取母)', '형사취수(兄死取嫂)'로 대변되는 근친혼 전통을 고수했다. 그 결과 말기 들어 황제들이 3대에 걸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생육능력이 떨어지고 낳은 자식 중 요절하는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근친혼 전통을 제외하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성애 문학으로 성가를 높였던 마르키 드 사드는 구약성서에 내재된 본질적 모순을 파악한 지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지구에서 천지창조라는 혼돈 상태가 끝난 후 근친상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류가 종족 번식을 할 수 있었겠는가?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 또한 근친상간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법으로 종족을 늘릴 수 있었겠는가?"

사드는 쾌락을 열렬히 옹호한 자연주의자였다. 그랬기에 이런 거침없는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이 말은 동성애와 근친상간 금기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한 기제로도 활용됐음을 폭로하는 문구인 듯하다.

참고도서

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관하여>, 사이언스북스

새디어스 러셀, <불한당들의 미국사>, 까치

미셀 푸코, <성의 역사>, 나남

데스먼드 모리스, <털없는 원숭이>, 정신세계사

박홍순, <욕망할 자유>, 사우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로저 트리그,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 궁리

신동준, <조선국왕과 중국황제>, 위즈덤하우스

송기호, <성씨와 근친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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