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의 시대

3·1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 '우리 민족도 할 수 있다'는 희망 가지는 한편,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해방이 안 되다니'라고 좌절하기도 했다. 전자는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후자는 일제와 타협하기 시작했다. 전자 중 일부는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항일세력을 키우기 위해 야학으로 뛰어들었다.

경남 '야학'에 빠져들다

희망을 품은 운동가들이 가장 쉽게 뛰어들 수 있는 것이 야학이었다. 왜 하필 야학일까? 당시 경남의 교육 현황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1929년 당시 경남지역 취학 연령대 남자 어린이는 13만 5647명, 여자 어린이는 12만 5675명이다. 하지만 당시 보통학교(초등학교)가 203개교 958개 학급에 불과했다. 그래서 약 26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 가운데 학교에 취학한 아이는 남자 어린이는 4만 1944명, 여자 어린이는 7847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초등교육이라도 제대로 받는 경우는 20% 미만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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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 어린이 계몽활동.

"물가조절을 부르짖고 경제의 핍박은 극도에 달했으며, 그중에서도 농촌상태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참상에 빠져 있는데, 각 학교의 월사금(학비)은 높아 서울의 청년들이 배우고자 해도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일이 많이 있음으로 최근에 이르러 학생은 물론이고, 전 사회의 문제가 돼서…"<조선일보> 1923년 1월 22일 자

게다가 일제는 구한 말 지역 유지들과 각계 인사들이 세운 사립학교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탄압해 1919년 당시 초등 교육과정을 하는 사립학교는 36곳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1935년에는 13곳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 민중은 교육에 대한 갈망을 안고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은 1919년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당시 야학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언급된 이름이 알려진 야학의 숫자는 총 114곳에 이른다. 그리고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1922년 경남지역 야학은 총 223곳에 이르며, 매년 14만 6679원의 경비가 소요된다고 집계하고 있다.

알려진 야학 114곳 가운데 지역 유지가 세운 것이 39곳, 사회단체가 세운 것이 50곳, 종교단체가 세운 것이 17곳에 달한다. 하지만 지역 유지가 세운 야학도 점차 사회단체의 후원을 받는 곳으로 성격이 변했다.

일제 강점기 야학의 최대 후원집단은 바로 진보성향의 사회단체들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야학을 운영하거나 후원한 사회단체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농민사, 노동공제회, 노동수양회, 노동계, 노동친목회, 무산동우회, 농우회, 소작인회, 농민공제회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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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조선어 보급 광고.

경남에서는 노동연맹회와 지역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었으며, 김해농민연맹(김해노동야학), 노우회(부산노동야학), 고성노동동우회(고성야학), 진주무산회(진주야학), 신간회 김해지회-근우회(김해 여자야학), 신간회 마산지회(마산노동야학), 신간회 진주지회-진주 근우회(근우야학), 신간회 하동지회-근우회, 울산언양농민조합, 형평사, 마산야소교청년회, 진영청년회, 통영청년회, 부산청년회, 진주청년회, 양산청년회, 김해청년회, 고성청년회, 거창청년회, 합천청년회 등이 있다.

야학에는 몇 명이나 학생들이 다녔을까? 경남지역 야학 가운데 학생 숫자가 파악되는 곳은 총 70곳에 이른다. 그 가운데 학생 수 200명 이상 대규모 야학이 4곳, 학생 수 150~200명이 되는 곳이 2곳, 101~150명이 되는 곳이 8곳, 51~100명이 30곳, 10~50명이 되는 곳이 26곳에 달한다. 따라서 야학의 규모는 대체로 수십 명에서 100명 내외로 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학생 수가 많은 곳은 웅천군 개통 야학으로 학생 수가 300명에 달했으며, 다음으로 범어사 동래 포교당에 237명이 다녔다. 진주군 내성동에 있던 제2야학교는 야간반 180명, 주간반 130명 등 총 310명이, 김해노동야학과 김해여자야학은 신간회 김해지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 김해지회가 함께 운영했는데 두 학교 합계 약 400명의 학생이 다녔다.

야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다양했다. 노동자, 농민 가운데 학령기를 놓친 사람을 1순위로 했으므로 사실상 연령 제한이 없었다. 부모와 자식이 같이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야학에서 가르친 과목은 참으로 다양했다. 조선어, 역사, 지리, 음악, 미술, 일본어, 영어, 산술, 한문, 독서, 위생, 작문, 토론, 수예, 재봉기술, 양잠, 농업, 사회주의 이론, 법률, 노동, 정치, 경제 등을 가르쳤다. 이 가운데 가장 중점을 둔 교육은 역시 조선어(한글) 교육이었다. 당시 일본이 세운 보통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비중은 10.9%에 불과했다. 한글을 쉽게 익히기 위해 야학에서는 노래를 많이 익히게 했다. 그중에 '애국가', '학도가', '혁명가' 등을 많이 익혔다고 한다. 특히 '혁명가'는 청소년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이쪽 골짜기에서 노래를 부르면, 저쪽 골짜기에서 화답하면서 합창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혁명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에 있던 산호리 야학에서 가르친 노래 3곡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노래 제목은 알 수 없다.

1.

정월이라 대보름 명절이건만

남산처녀들은 달맞이가네

달구경이 좋아도 나는 안가요

우리 누나 변또(도시락) 끼고 공장일가네

나는 나는 책보 끼고 학교에 가요

가난하면 슬프다고 누가 합디까

우리집이 가난해도 나는야 재밌어요

가갸거겨 좋은 책을

옆에다 끼고 학교에 가요

부잣집 아이들은 유리영창

넓은 곳에서 책상 위에서

이찌 니 산 배우지만

우리들은 배새는 초가집 등불 밑에서

가갸거겨 공부를 해요

2.

아버지의 더운 한숨

어머니의 눈물 속에

세상같은 담사포(?)

우리 무산형제야

이밋게(의미있게) 싸워라

철을 당하여

우리 무산형제야

3.

우리들은 약한 자

적대 당코 압박받은 우리들

노동자들아 단결하자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뭉쳐라

일제의 야학 탄압

이렇듯 사회단체가 주도한 야학은 진보적인 성향을 진하게 지니고 있었다. 일제는 야학을 '강습소와 농민조합은 거의 모두가 적색사상의 배양소 또는 행동처가 아니면 적어도 현 질서를 문란케 하는 사상의 주입 혹은 실행소'라고 규정하고 야학에 대해 탄압정책을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야학 탄압은 야학을 인가하지 않거나 야학 주도세력을 체포하면서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미 일제는 야학이 항일운동의 거점이 될 것에 대비해 1915년 탄압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 '강습회(야학) 개최 시에는 도지사의 허가를 얻어야 하며, 강습회 운영의 제반 사항이 부적당하거나 유해하다고 인정될 시에는 도지사가 허가를 취소할 수 있어야 하며, 기존의 무인가 강습회도 모두 인가원을 제출하여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규정을 제정해 놓은 상태였다. 수십 명 단위 소규모 야학은 일제 몰래 운영할 수 있어도, 100명 이상 대규모 야학은 일제의 눈을 피해 운영하기는 어려웠고, 결국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일제는 인가를 취소하는 방식으로 야학을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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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청년회관(하기호 제공).

일제의 대표적인 야학 탄압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간회 김해지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가 운영한 김해노동야학과 김해여자야학은 1928년 7월 25일 '관계자의 신원, 소행 등에 결점이 있다'며 야학 개설을 허가하지 않았다. 마산노동야학은 1926년 제2차 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야학의 주도자들이 대부분 검거됐는데 당시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이 옥고를 치렀다. 진주근우회가 운영한 근우야학은 1929년 7월 17일 경상남도에서 폐쇄명령이 내려졌다. 사유는 강사가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김해노동야학, 창원노동야학, 밀양노동야학도 강사가 불온하다고 해 폐지를 명했으며, 일부 야학에서는 일제가 지적한 강사를 교체하면서 겨우 야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일제는 1920년대 말까지는 개별적인 야학에 대한 탄압을 일삼다가 1930년대에 이르면 야학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이르게 된다. 1931년 10월 일제는 김해읍 지역 13개 야학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렸으며, 1932년 10월 일제는 남해군 전체 야학을 모두 인가 취소했다. 이렇게 대규모 야학 폐쇄 이후 일제는 '친일성향'의 야학을 육성했는데 그 숫자가 상당했다. 1931년 합천군 한 곳에서만 친일성향 야학이 94개소에 강사가 101명, 학생이 2183명이나 되었다.

<동아일보> 1937년 9월 10일 자 보도에 따르면 1922년 223곳에 불과하던 경남지역 야학이 1937년에는 무려 811개로 급증한다. 결국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거의 모든 항일성향 야학은 사라지고, 친일성향 야학이 대규모로 그 자리를 메우게 됐다.

참고자료

- <동아일보>

- <조선일보>

- 최윤경, <1920년대 경남지방의 야학활동>, 1996년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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