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루트를 따라 떠나다] (12) 아드리아해서 건져 올린 조약돌, 그 양면에 새겨진 흔적은
이탈리아서 독립한 산마리노 12세기 건설된 천혜 철옹성 동서남북 300리가 한눈에
로마 가도 3개가 있는 리미니 세력 확장·정보 수집 도구로 티베리우스 다리 건재 여전

괴테는 볼로냐에서 피렌체로 떠났다. 피렌체에서는 몇 시간 머물지 않았다. 마침 로마로 직행하겠다는 마부도 나타났다. 피렌체에서는 스치듯 지나 아레초로 내달렸다. 로마에 보물이라도 숨겨 놓았는지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로마뿐이었다.

이 행로는 기원전 217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이 겨울 숙영지였던 볼로냐에서 출발,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내려갔었던 바로 그 고행의 행군 길이었다. 한니발은 행군이 쉬운 리미니를 거쳐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하할 것이라는 예측을 완전히 뒤엎고 험악한 아펜니노 산맥을 넘었다. 리미니는 당시에 로마의 동부 요새로서 세르빌리우스라는 장군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괴테나 한니발의 행로보다는 당시의 전황을 생각하며 로마제국의 병참기지나 요새라 할 수 있는 리미니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리미니의 전투태세를 점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뿐 아니다. 리미니와 산마리노 이 둘 중에 누가 로마의 적자(嫡子)인지를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누군가는 로마의 적통을 이어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조문환

리미니에는 2시 55분에 도착했으니 아직까지는 한낮이다. 언덕 위의 산마리노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리미니에서 산마리노까지는 매 시간 한 번씩 운행하는 버스가 대중교통의 전부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탄 버스는 50분 만에 산마리노의 경사진 도로에 나를 내려 두고 종점으로 달려가버렸다.

산마리노에 묵게 될 숙소는 작은 호텔이었는데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숙박객이 거의 나 혼자뿐인 것 같이 썰렁했다. 저 멀리 리미니와 아드리아 해가 보이고 바람은 세차게 창문을 때렸다. 침대에는 앉아 보지도 못하고 카메라만 챙겨 곧장 고대 망루가 있는 티타노산(Monte Titano)으로 출발했다.

케이블카는 나만 태우고 가파른 성으로 올랐다. 제1 망루를 거쳐 제2 망루까지 다람쥐처럼 날아다녔다. 모두 군사 요새다. 12세기에 건설되고 그 후 중수를 하였다고 간판에 쓰여 있었다. 망루 아래 참호처럼 생긴 지하에는 대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산 아래를 향하여 눈을 꼿꼿이 치켜세우고 있었다. 제2 망루에서 본 1망루는 천년이 흐른 지금에도 아드리아해며 저 멀리 아펜니노산맥이며 바로 발아래 리미니와 볼로냐와 피렌체 쪽을 향하여 단 한순간의 경계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산마리노는 의원내각제의 정치형태이지만 아직도 형식상으로는 6개월씩 교대로 집정관이 통치를 하고 로마제국의 정신이 박혀 있는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가장 고귀한 공화국 산마리노'다. 정상에 올라서 보면 동서남북 사방팔방 300리 정도는 관찰할 수 있는 요새 중의 요새다.

산마리노 공화국의 상징인 티타노 산의 망루./조문환

◇유럽도시는 로마제국 병참기지

아침에 보니 북쪽 해안 끝으로는 도시가 보였는데 베네치아쯤 될 것 같다. 그 아래가 바로 리미니다. 초겨울 같은 거센 찬바람에 공화국의 국기는 타워에서 방패연처럼 날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비가 호텔방을 때리는 바람에 잠을 설칠 정도였다. 아드리아 해에 구름이 걷히고 푸른색 줄띠가 생기면서부터 하늘이 푸르게 바뀔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예약했던 하루 숙박을 취소하고 급하게 짐을 꾸렸다. 리미니로 가야 했다.

로마의 가도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가도를 내 두 발로 걸어 보고 싶었던 마음이 생긴 것은 10여 년 전 로마 역사를 읽을 때였다. 역사의 현장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군들 같지 않을까?

리미니에는 세 개의 고대 로마 가도(街道)가 있다. 이탈리아 국내에 건설된 가도는 모두 19개 정도인데 그중에 플라미니아 가도, 아이밀리아 가도, 포필리아 가도가 이곳에서 시작되거나 종착점이다. 플라미니아 가도는 로마에서 리미니까지, 아이밀리아 가도는 리미니부터 피아젠차까지, 포필리아 가도는 리미니부터 아르티눔까지가 그 주요 노선이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착공되고 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에 의해 서기 21년에 7년간의 공사를 거쳐 완성된 티베리우스 다리가 곧 아이밀리아 가도와 포필리아 가도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지금도 건재한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아래로 지나간다. 주변에는 원형경기장 자리도 그대로 남아 있다. 리미니 시에서는 2014년부터 2021년까지 그러니까 티베리우스 다리의 건축 시작과 준공 시점인 20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7년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가도가 있다는 것은 군사 요충지라는 뜻이다.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라고 하겠지만 위력으로 치면 수소폭탄을 가진 정도는 아니었을까? 병력과 마차가 동시에 강을 넘고 산을 넘을 수 있었으니, 이 가도는 아펜니노산맥도 넘는다. 그러니 리미니와 같은 유럽의 대부분 도시들은 로마제국의 병참기지로 출발했었다.

그때로부터 2000년이 더 넘었다. 아직도 티베리우스 다리는 대형 차량이 통과해도 문제가 없고 아우구스투스 개선문도 이 도시의 상징물로 여전히 건재하다. 동상으로만 서 있지만 로마를 로마 되게 한 카이사르까지 힘을 보태고 있어 시가지 전체가 작은 로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시장이 된 2000년 유적지

트레마티리 광장(Piazza Tre Matiri)에서부터 아우구스투스 개선문(Arch of Augustus)까지는 거대한 야시장이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철시를 시작했다. 무게 단위로 파는 옷들을 상인들이 봉지에 주섬주섬 집어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0년 유적지를 삶의 터전이자 싸구려 장터로 활용하고 있다. 자존심일까? 지나간 역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단절되지 않고 면면이 역사의 산 증인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암묵적인 행동 일 수 있다.

시내의 한적한 곳이나 산마리노와 좀 더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나의 숙소 주변에서는 산마리노의 두 개의 망루가 저 멀리 손에 잡힐 듯하다. 오늘처럼 하늘이 파란 날에는 더욱 그렇다. 여전히 위용이 장대하다. 비록 야트막한 산 위의 작은 망루 속에 있지만 그들 속에는 로마 제국의 피가 흐르고 있어 보였다. 아니 자신들이 그 피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마감되어 버렸지만 로마의 적통을 되찾고 싶은 욕망일 수 있다. 그것을 자청하고 소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산마리노 사람들이다.

하지만 2000년의 장엄한 유적과 문화유산을 하나의 야시장 터로 활용하고 있는 리미니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소리 없이, 구태여 그들이 로마인의 후손이라는 말 한마디나 구호나 깃발이나 성채도 없이 몇 뙈기의 밭을 갈아 먹는 농부로, 시장에 비린내 나는 물고기 몇 마리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로 살아가지만 오히려 이들 속에 로마인의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

닮았지만 다른 두 개의 얼굴, 산과 바다, 어제와 오늘을 지켜 내고 살아가고 있는 산마리노 사람들과 리미니 사람들. 그들의 검은 얼굴과 손바닥에 리미니의 해안 아드리아해에서 내가 건져 올렸던 작은 돌멩이에 박힌 지문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시민기자 조문환

20.jp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