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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열전]거창군 위천면 김종순 할매

강원도 영월 주천이 고향, 한국전쟁 때 형제 모두 잃어 스물에 결혼 스물 여덟 사별
장사·공장 등 안해본 일 없어…경남 정착한 자녀들 덕분에 꽃 따 말리며 여생을 즐겁게

시민기자 권영란 webmaster@idomin.com 2018년 07월 30일 월요일

꽃아 꽃아, 네 이름이 뭐니? 나랑 놀자꾸나!

"이제는 길을 가다가도 예쁜 꽃이 있으면 조심조심 따서 모아요. 모르는 꽃은 이름을 찾아보거나 딸한테 물어보고요."

1941년생 김종순(78) 할매. 거창군 위천면 작은 마을에서 꽃을 따고 꽃을 말리는 할매다.

"내가 바빠요. 꽃 말리느라고…. 봄여름가을 꽃 따서 말리고 겨울에는 포장해요. 딸이 요양보호사인데 말린꽃 체험프로그램도 해요. 올해 봄부터 처음 해본 건데 잘한다 해요. 공짜 아니에요. 딸이 용돈을 줘요."

딸이 바빠 꽃을 따 말릴 새가 없으니 종순 할매가 틈틈이 산과 들에 핀 꽃을 따서 책갈피에 말려 줬다. 그랬더니 딸이 "엄마 참 잘한다"며 꽃 따서 물들이라고 물감 갖다 주고, 진공포장기도 갖다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꽃 말리기 일이었다.

한국전쟁 피난살이에 4·19혁명까지 겪어

종순 할매, 조용조용 말하는 말씨에 경상도 말투가 살짝 섞여있지만 경상도 말씨가 아니다. 고향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라 한다. 강원도서 여기로 시집온 거냐며 놀라니, "거창에 온 지는 14년 정도 됐네요. 평생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니며 살았지요"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이 났을 때 9~10살이었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있을까. 이북 사람들이 넘어온다고 군인들이 가래서 밥 먹다가도 걸어가고. 강원도에선 9살부터 피난살이가 시작됐으니. 내 집 놔두고 가는 거이 우찌나 마음이…."

무조건 남으로 남으로 피난 가야 했다. 추운 겨울인데 대구쯤이었을까, 강을 건너는데 강물이 온통 핏물이었다.

말린 꽃을 넣어 꾸민 액자에는 열아홉 살 때 사진이 있었다.

"다들 다리가 얼어서 터지고 이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건넜는지 강이 뻘개. 자다가도 밥 먹다가도 군인들이 가라면 가야하고. 울 아버지는 이불, 쌀보따리 이고. 내가 힘들어 못가면 저만큼 가서 짐 벗고 다시 나를 데리러 오고. 아버지는 계속 왕복해야 하고. 단양 고모집에 가서 남동생이 죽고. 또 동생 죽고…. 아버지가 인민군들한테 붙들려갔다가 우찌 도망을 나왔는지 새벽에 논두렁을 기어기어 왔더래요."

휴전이 되고 다시 강원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피난길에서 형제들은 다 죽고 종순 할매 혼자 살아남았다. 몇 년 후 증조할머니뻘 되는, 아버지 당숙모가 애보기로 서울로 데리고 갔다. 종순 할매 18살 무렵이었다. 힘들었지만 즐거운 추억도 있다.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과 종로 창경궁, 덕수궁으로 놀러 다니기도 했다.

"저 액자 사진이 19살 땐가, 4·19 터지기 전에 찍은 사진이네요. 마포 경보극장, 신촌 신영극장, 종로 국제극장, 장춘단공원 등 놀러도 많이 다녔네요. 그때만 해도 크게 뭐, 자유가 없이 사니까. 친구라도 시숙의 딸이라, 사돈지간인데 친구처럼 지냈지요."

그러다가 1년 뒤 19살 무렵 4·19가 터졌다. 오후 5시만 되면 통행금지가 되고 함부로 나다니지도 못했다.

"그때도 난리통이야. 쫓겨 댕기고. 동대문경찰서 데모해서 불 지르고 할 때 쫓겨 다니고. 군사혁명 때도 골목으로 쫓겨서 집으로 가야하고요. 전차도 겨우 타고 다녔어요. 애들 데리고 가다가 신발 벗어졌다캐서 신발 주러 갔는데 군인들한테 식겁 먹고 쫓기고. 무서웠어요."

스물여덟에 남편 잃고 애 셋만 오롯이

그러다가 제천 사는 이모가 중매를 해서 충북 청풍으로 시집을 갔다. 이때가 20살인데 안 가려는 것을 억지로 보냈다. 어른들은 다 큰 딸내미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고 서둘렀다.

"시집을 가보니까 역시 아니더라고. 신랑은 잘 해주는데 시골이라도 너무 깡촌이라 시장을 한 번 보더라도 20리길을 걸어가야 하더라고요. 게다가 신랑이 내가 애 둘 낳고 군대 갔어요. 옛날에는 36개월이니까, 꼬박 3년 동안 신랑도 없이 시댁 살림을 다 살았어요."

남편 제대 후에도 3년을 그리 살았더니 시아버지가 충주로 살림을 내줬다. 남편은 충주 전매청 담배제조조합에 다녔다. 그런데 얼마 후 그만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나이 30살이었다. 종순 할매는 28살에 애 셋 데리고 혼자가 되었다. 8살, 6살, 8개월 된 아이들. 그중에 한 아이는 소아마비 폐렴에 걸려 14살에 죽었다.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울고 있을 틈이 없었다. 돌봐야 할 두 애가 있었다. 종순 할매는 단양 제천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따리 옷 장사를 했다.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들고 하루에도 몇 리를 걸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다시 서울로 갔다. 종순 할매, 41살 무렵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머리에 이는 것은 절대로 안 해요. 차라리 안고 끌고 다니지. 애도 절대 안 업어요. 전쟁 나 피난 갈 때도 내가 동생 업고 갔는데…. 그 후에도 동생 업어 키우느라 하도 힘들어서."

다시 돌아간 서울에서 종순 할매는 뭐든 해야 했다.

"오뎅공장, 후추 빻는 공장도 다니고, 비니루 공장, 한일도루코도 가고, 답십리에서 구멍가게도 하고, 박스 공장도 다니고, 요지(이쑤시개) 곽도 접었는데 하루에 1000개 만들면 지금 돈으로 3만 원이나 될까. 당시 돈으로 300원이었으니. 스뎅 나올 때는 그릇 장사도 하고. 집에 쌓아놓으면 와서 사 갔다. 박스공장이 제일 힘들었다. 지금은 자동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수동으로 하니까. 찍고 붙이고 갖다 날라야하고. 나는 농사는 못 짓것더라고요. 도저히…."

몇 개의 공장을 전전했는지 손꼽아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

"나이가 있고 여자 혼자 애 둘 데리고 산다고 무시하데요. 아니꼬우면 두 말도 안 하고 나왔지요. 반말 찌익직하고 대우를 안 해요. 그러다보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래도 내가 남하고 싸우지는 않았어요. 바른 말을 잘 하지 왁자지껄 싸우지는 못해. 가진 것은 없어도 자존심으로 사는 거지."

봄여름 말린 꽃을 보여주는 김종순 할매. /시민기자 권영란

종순할매, 이제 거창살이 14년째다.

아들딸네가 이곳 경남에 자리 잡으니 이곳까지 따라 오게 된 것이다.

"저기 모동에서 11년 살다가 요기로 2015년 4월 21일 왔으니, 햇수로 3년 됐네. 딸네집도 요 근처 있어요. 노령연금 20만 원 받고 딸이 용돈 주고 며느리가 용돈 주니 그럭저럭 살아요. 아들보다 우리 며느리가 잘 챙겨줘요."

종순 할매는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지금 살고 있는 작은 집 한 채뿐이라 했다. 혼자라 적적할 때도 있지만 주변에 동무들도 있고, 지금은 세상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했다.

"내 묵을 거는 저기 마당 텃밭에서 다 나와요. 저 마당 밭에서 나는 게 12가지도 넘어. 쪽파 당근 토마토 고추 오이 상추 쑥갓… 내는 안 사먹어요. 저 밭이 내 야채 슈퍼야. 다 있어요. 아이쿠, 날 뜨거워지기 전에 꽃 따러 가야하는데…." /시민기자 권영란

김종순 할매 생신날. 삼대가 모여 꽃부채를 만들고 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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