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 인터뷰 재구성
부산수도국서 33년, 퇴직 후 목욕탕 주인 꿈꿨지만
막내아들 바라던 세상 오도록 민주화 투쟁에 앞장
종철이 기억하는 이 많아…내가 더 많은 자식 얻어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John Donne·1572~1631)은 기도문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느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보듯이 좀 더 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람은 인류의 한 분자로 모든 사람의 삶은 서로 연결돼 있다. 나는 7월 28일 아침 운명하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을 생전에 두 번 만나 뵌 적이 있고, 서너 차례 통화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권중희 선생과 백범 암살진상 규명차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갈 때 금일봉을 보내주시는 등, 이후 내 인생길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신 분이시다.

아들 박종철 흉상 옆에 선 아버지 박정기 선생. /오마이뉴스

박정기 선생, 1929년생으로 (2003년 6월)당시 일흔넷이었다(올해 여든아홉으로 소천). 경남 동래(현 부산광역시)에서 중농 집안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 부산수도국에 들어간 이후, 날이면 날마다 수도 파이프를 만지면서 33년을 보냈다. 당신은 정년퇴임 후에 목욕탕을 차려 '목욕탕집 주인'으로 남은 생을 마감하는 게 소원이라 했다.

그런 그가 1987년 1월 14일, 막내아들 종철을 잃은 뒤부터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다. 아들의 죽음이 당신의 운명을 확 바꿔놨다. 태백산맥과 같은 꿋꿋한 민주투사로.

그날 오후 4시 무렵,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뜰에 세워진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 앞에 도착했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독재의 아스팔트 발바닥을 태우던 1987년 6월 어느 날, 너의 모습이 일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영영… 그러나 눈물 흐릿한 시야 바깥으로 겨울이 거대하게 빠져나가는 광경 또한, 들렸다. 그렇다. 나아가는 자 시간을 알고 역사를 느끼며, 그 너머 죽음을 가슴에 미리 새긴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보다 희망의 나이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의 찰나, 찰나의 광경에 동참한다. 그것은, 그것이 너의 광경…. 박종철, 여기 10년 동안 견고해진 눈물로 너를 세운다. 1997년 6월."

당신은 이곳을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찾는다고 했다. 그는 우선 비 앞에 참배객들이 두고 간 마른 꽃다발을 치운 뒤, 비 뒤에 놓인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91. 10. 24. 종철이를 추모하는 벗들이"라고 새겨진 돌로 가서 새들이 남긴 하얀 배설물을 닦았다.

2007년 1월 14일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 및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선포식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가 물고문당한 509호실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이런 일들을 늘 해왔듯 아주 익숙하게, 마치 대학 관리인처럼 스스럼 없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비 언저리를 깨끗하게 치웠다. 청소가 끝나자 당신은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식은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내가 이 비를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만 오면 다른 분들에게 미안해요. 서울대학교에서만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이가 여럿 되고 종철이 이전에 우종원, 최우혁, 김용권, 김성수 같은 이도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았는데… 우리 종철이만 이렇게 비까지 세웠으니 정말 죄송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뜻밖의 말씀이었다. 천금보다 귀한 자식을 잃고도 행복한 사람이라니.

"사람은 한번 죽는데,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종철이는 죽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으니 복이요, 그 복으로 내가 더 많은 자식을 얻었으니. 그 놈이 애비에게 잔뜩 복을 안겨주고 간 거지요. 여태 자식의 시신도 못 찾은 이도 얼마나 많은데…."

득도한 스님 같은 말씀이었다. 마침 가까운 등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일대를 그놈이 얼마나 쏘다녔겠어요. 아주 바지런한 놈이었거든요. 이곳에 올 때마다 아직도 어디선가에서 '아부지' 하고 그 놈이 달려들 것 같은 착각에 빠져요."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길이 바뀐 셈입니다. 아들을 원망해 보지 않았습니까?

"대학 입학 후 경찰서에 드나든다는 걸 알고서는 그 당시 대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통과의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실 나는 지방 공무원이었고, 정치에는 별로 관심도 없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내 소원이 퇴직 후 목욕탕 주인으로 손자들 재롱 속에 내 인생을 마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을 잃고 내 눈이 떠졌습니다. 종철이가 죽고 난 뒤 곧 정년퇴임하게 됐고, 그후 유가협에 참석하게 됐지요. 여기 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몇 해 전 강경대 군 사건 때는 재판 방청 중에 법정 소란으로 석 달 남짓 교도소 생활도 했지요. 이 모두가 아들 때문이지만 한 번도 그 놈을 원망해 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놈이 내 눈을 띄워준 효자지요.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죽는 날까지 내 힘 자라는 데까지 지가 바라던 세상이 오도록 투쟁의 대열에 앞장설 겁니다."

-아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주' '민주' '통일'. 이 세 말입니다. 사실 해방 후 모든 문제는 조국 분단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분단 문제 해결이 사회 갈등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분단 극복이 쉽지 않은 줄 압니다. 하지만 남북이 인내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정부 간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교류가 더 잦아져야 합니다."

2017년 1월 14일 부산 부산진구 서면 중앙대로에서 열린 '제11차 시국집회'에서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맞아 박정기 씨가 촛불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대담 마무리 말씀을 해주십시오.

"아쉬운 것은 현재 운동권 역사가 잘 조명이 안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론과 학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 같습니다. 그들이 그렇지 못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이 있는 듯한데, 이럴수록 백성들은 체념할 게 아니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로 대학 뜰에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유가협을 이끌고 있기에 그 일도 만만치 않은 듯, 대담 중에도 몇 차례 전화가 왔다. 저녁에 또 만날 분이 있다고 해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동대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을지로3가에서 그날 찍은 사진을 맡기기 위해 내리고, 아버님은 창신동 '한울 삶' 집으로 향했다.

/오마이뉴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