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죽음으로 강해진 기독교 공동체
노회찬 잃은 정의당도 진보의 꿈 키워야

예수 이후에 탄생한 기독교는 박해와 순교의 종교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수 본인이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고 로마인의 방조 속에 십자가 처형을 받았기에 고통과 죽음은 기독교 믿음을 이루는 뼈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가 당시에 처한 상황은 사실 최악이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겐 '이단'으로 낙인찍혀 배척당했고, 제국을 경영하던 로마인들은 유대인 주류들과 결탁해 그들을 향하는 폭력에 눈감았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혹은 부제) 중 하나였던 스데반(혹은 스테파노)이었다.

예수가 부활하고 50일 되던 날(오순절) 하나님의 영(성령)이 예수를 따르던 무리에게 임하는 기적이 일어난 뒤 예루살렘에 있던 공동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성령이 임했다고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풀리진 않았다. 공동체는 출신 성분을 놓고 갈등에 휩싸였다. 우리말로 '동포'에 해당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본토 출신의 히브리파 유대인의 차별에 밀려 복지 프로그램에서 소외되는 일이 벌어졌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사 일곱 명을 세웠는데 스데반은 그중 하나였다.

스데반이 주도한 공동체는 해외파도 포용하는 보편성을 추구했다. 본토 출신이란 특혜를 누리던 히브리파들이 당장 반발해 그를 붙잡아 유대인 회당 시나고그에 세웠다. 스데반은 그 자리에서 주눅 들지 않고 구약 성서를 인용해가며 유대인 중심의 율법주의, 즉 근본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의 설교를 견딜 수 없었던 주류 유대인들은 그를 끌어내 돌로 쳐 죽였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였다.

네로가 황제로 있던 64년 7월 어느날 대경기장 아래 한 가게에서 시작된 불길이 로마 전역에 번졌다. 인기가 바닥이던 네로가 재건축 사업을 위해 혹은 불길을 보고 노래를 부르려고 일부러 불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황한 네로는 자기를 향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방화범으로 당시 소수자였던 기독교인들을 지목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를 물어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들개 떼에 던져주기도 하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에 물려 죽게도 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리스도교 신학을 세운 바오로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움츠러들기는커녕 더 강해졌다. 그들이 내세와 부활의 믿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공동체가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순교(Martyr)'라는 말부터 그랬다. 의미 있고 명예로운 죽음은 공동체가 책임지고 기억하겠다는 뜻이다.

지난 23일 우리는 안타까운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노회찬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슬퍼하며 눈물 흘렸다.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투명인간들 곁을 지키려고 평생 헌신한 그이기에 더욱 그랬다. 추모의 글에 "기억하겠다, 행동하겠다"는 내용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그의 몸은 떠났지만 그의 꿈과 정신만큼은 우리 속에 계속 살아 있게 하겠다는 다짐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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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죽음을 접하며 초기 기독교 순교자를 떠올린 것은 한국의 진보가 처한 상황이 로마시대 기독교인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공포를 죽음에 대한 공동체의 기억으로 이겨낸 것처럼 우리도 진보의 꿈을 노회찬에 대한 기억으로 키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지난주 내가 정의당에 입당한 것도 그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하는 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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