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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꺼낸 말]<기억을, 섬돌에 새기는 눈물들>

박훈 지음
얼음같은 '통한의 시간' 녹인 뜨거움
고통스러운 나날의 기억
종이에 쏟은 치유의 흔적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2018년 07월 27일 금요일

이슈나 논란의 중심에서 과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 변호사 박훈.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으로 영화에서 그린 그대로 입이 거칠다.

'그 다혈질 변호사가 시집을 냈다고? 뭐야 예쁘게 생긴 시집이잖아.'

알고 보니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페이스북에다 시를 써왔다. 어디에 이런 감성을 숨겨 놓았던가 싶을 만큼, 가슴을 두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근데 왜 시였을까? 그는 2014년 세월호 사건(그는 학살이라 표현했다.) 이후 느닷없이 시가 나왔다고 했다.

"그 분노와 좌절의 시기에 나를 살리기 위해 시가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3년을 그렇게 쓰고 보니 더 이상 쓸 것이 없었다. 족히 수백 편을 썼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세월호가 박 변호사에게 준 충격은 컸다. 할 말을 잃었던 그가 어느 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숨을 쉬려고 시를 쓴 셈이다. 지인들에게 '시가 나를 살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썼던 시들을 추려 모아 시집 <기억을, 섬돌에 새기는 눈물들>(글상걸상, 2018년 5월)을 내놨다.

읽고 보니 꼭 자서전 같은 시다. 그는 시를 통해 삶의 애잔했던 굽이를 뒤돌아보고 있다.

"아버지가 탄광에 갇혀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온 날, 엄마는 아랫목 이불 속에 놓아두었던 밥을 말없이 꺼내 밥상에 올린다. 술 취한 아버지를 눈구덩이에서 끄집어 내온 날, 아버지가 어린 직장 상사한테 술병으로 머리가 깨져 들어온 날, 엄마는 아랫목 이불 속에 놓아두었던 밥을 말없이 꺼내 밥상에 올린다. 아버지가 진폐로 돌아가신 날, 엄마는 아랫목 이불 속에 놓아두었던 밥을 말없이 꺼내 제사상에 올렸다." - '아랫목 밥' 전문

"마지못해 다닌 회사, 썩어 문드러진 심장 꺼내 가스레인지 팔았다. 동양매직 전주지사 영업사원, 발바닥으로 소주를 먹고, 팔뚝에 담뱃불 지지며 개가 되어가고 있었다."- '불바다' 중에서

그의 시는 또 젊은 날 치열하게 매달렸던 노동 해방, 이제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 혁명에 대한 넋두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였지/같이 투쟁 현장에서 한솥밥 먹고/같이 자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했었지. (중략) 그런데 지금은 말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지/ 우리는 이제 같이 울고, 같이 웃지 않아/ 서로 증오하고, 비아냥거리고 있지/ 너는 임금 노예가 되어 그 돈으로/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주식도 받아/ 한밑천 챙겨 가난한 나를 면박 주고 있지/ 그렇게 살아서 네가 얻은 것이 뭐냐고" - '화해할 수 없을 거야' 중에서

"10년 뒤면 다 정년퇴직하고/ 노동조합은 껍데기만 남지/ 드문드문 들어온 이 젊은 노동자들은/ 섬이 되던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부리는/ 삐까번쩍한 감독자가 되어 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될 거야//묻더라. 어찌해야 되냐고/ 어찌할 것도 없어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야 "-'노동계급' 중에서

박훈 변호사는 그렇게 현실에서 좌절한 것인가. 글쎄, 삶을 한 번 점검할 연배, 그는 시를 통해 잠시 지난날을 돌아봤을 뿐이다. 세상의 위선을 혐오하고 할 말은 하는 그의 야무진 걸음은 그대로일 테다.

"내 고향 화순 도암면 운주사에는 일어날 의지가 없는 사기꾼 미륵 와불이 있다. 뺨을 쳐서 일으키고 싶지만 들어가지 못하게 목책을 둘렀다."- '운주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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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후 기자

    • 이서후 기자
  • 문화체육부에서 문학/영화/연극/출판 등을 맡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