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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과 문화] (6) 이어지는 동범문화 선인들

맑게 놀았으니 멋진 이야기 하나 남기지 않으랴
낙동강 뱃놀이 즐겨뛰어난 절경보고 시문 짓기
임진왜란 영웅들의 풍류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각종 문헌에 꾸준히 언급

공동취재팀 webmaster@idomin.com 2018년 07월 27일 금요일

1607년 정월의 용화산 동범은 대단한 것이었다. 함안·창녕 일대 낙동강에서 벌인 뱃놀이는 용화산 동범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용화산 동범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에는 이전 뱃놀이가 나오지 않는 반면 이후 뱃놀이 기록에는 용화산 동범이 빠짐없이 나온다. 그만큼 용화산동범이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창녕·함안 두 고을에서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을 맞아 분투한 한강 정구, 젊은 나이 당대 우뚝한 학자였던 여헌 장현광, 임진왜란 왜적에 맞서 싸웠던 경술 박충후 당시 함안군수가 이끌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이를 증거하는 뱃놀이가 1700년 3월 21일에 있었다. 93년이 지났지만 기억은 생생했다. <모계문집>에 '창암동범록'이 나온다. 함안 사람 모계(茅溪) 이명배(李命培·1672∼1736)의 글을 모은 <모계문집>에 '창암동범록'이 실려 있다. 좌장은 경북 영해 사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년)이었다. 집안은 가난했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숙종의 부름을 받아 거의 날마다 임금과 세자를 가르친 학자였다.

이현일은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694년 4월 옥에 갇혔다가 7월부터 추운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을 살았다. 1697년 5월 나이가 일흔이 되었다는 이유로 따뜻한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져 1699년 2월까지 살았다. 그 뒤 임금은 유배를 풀었지만 사간원·대사헌이 반대하였다. 게다가 돌림병이 겹쳐 하동 악양과 진주 청원(지수면)에 머물며 명령을 기다렸다. 1700년 2월 사헌부에 이어 사간원이 죄인 명부에서 빼주었다.

경양대. 오른편 하얀 건물은 창원상수도사업소의 칠서취수장이다. 가운데 즈음에는 한국농어촌공사의 진동양수장과 국토교통부 낙동강홍수통제소의 진동강수량·수위관측소가 함께 보인다.

갈암은 고향 가는 도중에 함안·밀양에서 조상 산소를 보살피고 영산현(창녕군 영산면) 객사에 들렀다. 당시 영산현감은 권두경(權斗經·1654~1725)인데 갈암의 제자였다. 게다가 참의·참판·대사헌 등에 오르내린 데다 성균관좨주를 맡는 등 사림에 대한 영향력도 컸다. 현감은 스승을 영산 사람 신몽삼(辛夢參·1648~1711)의 강변 별장(강서·江墅)으로 모셨다. 뜨락과 섬돌이 감당 못할 정도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권도경은 '창암동범록 후서(後序=뒤에 붙인 서문)'에서 배를 타기까지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늦봄 강가에 비가 가득 내리고 김이 서렸다. 바깥 너른 들판에서 언덕을 거니니 글과 같고 그림과 같았다. 선생이 즐거워하였다. 마루에 올라 이리저리 오가고 여기저기 바라본 다음 배를 잡아타고 물을 거슬러 올랐다."

배에서 보는 풍경은 어땠을까. "강가를 따라가니 언덕이 돌아나오고 층층 벼랑 오래된 구멍들은 귀신이 깎고 파낸 듯하다. 즐겨 낚시할 돈대는 벼랑이 강가 흙이 되었고 백보 거리에 인가가 있다. 한 굽이 또 도니 바로 창암(蒼巖)인데 옛적 망우당이 오두막을 지었던 자리다. 강물은 돈대를 패옥처럼 휘감고 배는 창암을 휘감으며 떠간다. 창암이 다하니 이윽고 멈추어 노를 내려 흐름 따라 내려간다. 비는 개고 흩뿌리기를 거듭하는데 김도 서리고 구름도 모였다 흩어지니 기이하다. 하얀 모래와 그 너머 드넓은 푸른 풀이 이곳 강호를 으뜸으로 멋지게 하였다." 날이 저물 즈음 선생은 돌아갔고 뒤이어 한 사람이 용화동범록을 바쳤다. 이를 따라 함께 선유한 이들 이름을 적고는 창암동범록(蒼巖同泛錄)이라 하였다. 모두 마흔여섯이었다. 영산 사람 신대진(辛大晉·1643~1711년)이 쉰일곱으로 나이가 가장 많았고 10~20대도 영산 사람 배순거(裵舜擧) 등 열대여섯이 되었다.

별장 주인은 경위를 적었다. "한강·여헌·망우당이 용화산 아래서 배를 타고 일찍이 명승을 좇아 함께 노닐었다. 후세에 전하는 기록이 있는데 간송당 조임도가 서문을 지었다. 풍류는 쉬지 않았고 강산은 기다려 주었다. 갈암이 조심조심 바위에 올라 망우대를 바라보았다. 낙동강 정자 아래 배를 띄우고 많은 선비가 창암 물결 위로 함께 거슬러 올랐다. 이렇게 동범한 것을 적었는데 태수 권두경의 붓이다. 용화산은 낙동강 남쪽 물가에 있으니 나의 강변 별장에서 돛단배를 서로 바라보는 자리다. 앞뒤로 맑게 놀았으니 어찌 멋진 이야기 하나 남기지 않으랴."

망우정 뒷동산에서 바라본 낙동강. 건너편에는 모래톱이 대단했으나 4대강사업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시문도 붙였다. 갈암 이현일의 한시에서 운을 딴(次韻) 것이다. "계수나무노를 젓던 용화산이 얼마나 세월이 지났나/ 드높은 풍류 남은 운치 남주(南州)를 뒤흔드네./ 오늘 신선의 뱃놀이로 옛날 즐거움을 찾아간다/ 꽃다운 행적 백세를 흘러 더불어 전해지리." 밝고 가볍다. 반면 갈암의 원운(原韻)은 어둡고 무겁다. "옛적 망우당이 의리로 창칼 들던 시절 떠오르네/ 영웅의 풍모 장사의 절개로 동주(東州)를 차지했네/ 이제 맥없이 바라보니 샘물의 근원이 막혀 있네/ 말없이 탄식하며 푸른 흐름을 굽어본다." 샘물의 근원을 막은 것(泉原隔)은 자기를 귀양보내도록 만든 반대파 신하들이었을까.

창녕·함안 일대 낙동강 뱃놀이에서 용화산동범을 떠올렸다는 기록은 이밖에 몇몇 더 있다. 영남 유학의 대가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는 1885년 대구 현풍 도동서원에서 배를 타고 문인 장승택·안찬 등 33명과 함께 경양대와 용화산 일대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합강정에서 자는 등 며칠을 머물렀는데 여헌 장현광의 후손이었기에 당연히 선조의 자취가 떠올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앞선 시기 1628년 4월에도 있었다. 조임도와 양훤(1597~1650) 등 9명이 경양대 아래에서 달밤에 배 타고 술 마시며 놀았다. 네 가지 아름다움-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감상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과 두 가지 어려움-어진 주인(賢主) 훌륭한 손님(嘉賓)-을 두루 갖춘 자리였다. 조임도와 양훤은 각각 경양대하선유기(景釀臺下船遊記)와 경양대동범록을 남겼다. 조임도는 한 해 뒤에 한시도 지었다. "…고개에 구름 달을 토하니 맑은 빛이 동하고/ 강가 나무 바람을 머금으니 기운이 상쾌해지네/ 만고 영웅은 외로운 새 지나간 흔적 같으니/ 천년 형승에 술동이를 연다네…". 여기서 만고 영웅은 당연히 곽재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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