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의원 불출마·단일화 실패로 '진보정치 1번지' 창원 성산 선거구 넘겨줘
부족한 지역 연고에도 탁월한 정치력 발휘…진보진영에 활력 불어넣어

"'진보 정치 1번지' 창원을 복원하라는 당원 명령과 정권교체 밀알이 되라는 시민 요청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고(故) 노회찬 의원이 2016년 2월 1일 '창원 성산'을 지역구로 20대 총선 출마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밝힌 일성(一聲)이다.

진보 진영에 창원 성산은 '빼앗긴 들'이자, '아픈 손가락'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국회의원에 당선함에 따라 '진보 정치 1번지 창원 성산'의 역사가 시작됐다. 4년 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권 전 의원이 진보 정당 국회의원으로 사상 처음 재선에 성공하면서 역사는 신화가 됐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4년 뒤 정치적 견해차로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뉜 후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진보 진영은 끝내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못해 새누리당 후보에 국회의원 자리를 내줬다.

▲ 지난 2016년 20대 총선에서 승리가 유력해지자 환호하고 있는 노회찬 의원 캠프. 그는 노동단체, 시민사회단체, 민주당과 연대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경남도민일보DB

당시 '정치 도의'를 저버리고 국회의원에 도전한 통합진보당 후보와 이를 비판하며 출마한 진보신당 후보 간 격한 대립이 '진보 정치 1번지' 명성에 금이 가도록 했다. 이때부터 창원시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던 진보 진영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 궤멸하는 타격을 입었다. 도내 제1 야당 지위를 잃은 것은 물론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수많은 진보 정치인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노 의원이 애초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노원병'을 놔두고 '창원 성산'을 택한 것은 무너져가는 진보 정치를 복원하고,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자 함이었다.

창원 성산 행을 결정한 노 의원을 두고 많은 사람이 그의 부족한 지역 연고를 문제 삼았다. 보수는 물론 정치 지향을 달리하는 진보 진영에서도 견제구를 날렸다. 하지만, 그가 창원과 맺은 인연이 마냥 얕지만은 않았다.

1970년 중반부터 중화학·기계 산단이 조성되기 시작한 창원은 1980년대 들어 인천, 울산과 함께 한국 노동운동 3대 축으로 성장했다. 그만큼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도 커졌는데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이를 폭발시켰다. 노 의원은 이때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결성을 주도했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 조직을 목표로 삼았다.

노 의원은 1989년 인민노련 활동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2년 6개월 간 옥살이를 한다. 1992년 초 만기 출소한 그는 그해 진보정당 시초인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결성한다. 이후 1995년 9월까지 사무총장과 대표를 역임하면서 진보정치가 뿌리내릴 핵심 지역으로 창원을 꼽았고, 주대환 씨 등 지역 인사와 교류했다. 이때 노력이 밀알이 돼 국민승리 21, 민주노동당 창당, 권영길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싹을 틔웠다.

이렇듯 반평생을 진보정당 운동에 바친 그에게 진보 정치 새 역사를 쓴 '창원 성산'은 보수진영으로부터 반드시 탈환해야 할 고지였다.

노 의원이 창원 성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보인 행보도 의미 있다. 그는 손석형 후보와 민주노총 단일화,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단일화로 높은 당선 가능성을 지닌 스타 정치인이라는 장점을 내려놓고 특정 정치 지향과 당파를 벗어나 창원 진보 전체가 다시 뭉치는 길을 열었다.

당선 후 매주 지역구 첫 일정은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밥을 먹고, 애로점을 듣는 현장 정치로 시작했다. 20대 국회 제1호 법안으로 '정리해고 제한법'을 발의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아울러 그동안 '담론' 위주였던 진보 정치를 '생활 중심'으로 전환해 노동자 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자 노력했다. △도시가스 요금 △쓰레기 종량제 봉투 값 △상·하수도 요금 등 '생활요금 인하' 공약이 대표적이다. 이 중 도시가스 요금은 노 의원 임기 내 매년 점진적 인하가 이뤄졌다. 국회의원이 '정치'가 아닌 '정책' 영역에서도 유의미한 역할을 한 사례였다.

이같은 노력은 침체에 빠졌던 창원 내 진보 진영이 다시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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