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쉰, 미학전공자이자 시인 '대만 최고 문인'
과거·현재 잇는 '성찰의 힘'

책을 읽으며 자꾸 경주 황룡사지가 생각났다.

신라 최고 전성기 100년에 걸쳐 지은 호화로운 황룡사. 바닥 한 면이 22m, 높이가 80m나 됐다는 황룡사 구층목탑,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 컸다는 황룡사 범종, 솔거가 그린 벽화, 인도에서 보내온 구리와 황금으로 만든 금동삼존장륙상. 하지만, 이 모든 게 여지없이 사라지고 모든 영화를 떠받치던 터만 황량하게 남아 있다. 처음 황룡사지를 찾았을 때 그 쓸쓸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늦은 오후, 약해진 햇살이 부스러기처럼 남은 흔적들을 비추고 있었다.

아마도 신라 전성기의 영화가 영원히 지속할 것 같은 마음으로 한 층 한 층 지어 올렸을 것이리라. 어둑해지는 들판 한가운데 서서, 노을처럼 저물어간 제국의 영광과 인간 문명의 그 허망함에 대해 내내 생각했었다.

"제국은 쇠잔해진다네. 번영도 언제든 타올랐다 스러지지. 하지만 제국이 번영하는 시기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쉽지 않네. 어쩌면 여기 바푸온에 와서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시기가 아닐까?"

<앙코르 인문 기행>은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Angkor) 유적에 대한 책이다.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어진 크메르 제국의 수도로 동남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9고학 유산 중 하나다.

책은 글쓴이 장쉰이 친구 밍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앙코르 유적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세밀한 묘사와 설명이 놀랍다. 물에 비친 모습에서까지 상징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미적 감각 또한 대단하다. 개인적으로는 앙코르 유적이 힌두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하지만, 책은 단순한 여행기나 유적 설명서가 아니다. 글쓴이는 유적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끊임없이 지금, 우리를 성찰하고 사색한다.

"밍,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멈춰 사진을 찍는다네. 사원의 진정한 중심으로 들어서기 전에 환영에 미혹되지. 2개의 연못은 잘 닦인 맑고 깨끗한 거울 같네. 우리는 환영 앞에 머물며 환영 뒤에 진상이 있음을 잊어버리네. 진짜는 아직도 저 멀리 있는데. (중략) 만약 미혹되는 것이 과정이라면 우리는 '깨달음'과는 아직 멀리 있는 듯하네. 앙코르와트는 건축의 기적이라고 불리지. 그러나 기적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이토록 완벽하고 처절하게 깨달은 건설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앙코르 유적 여행에 굳이 이 책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앙코르에 가지 않더라도 굳이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하겠다. 결과적으로 책은 앙코르 유적에 기대 지금, 여기, 우리를 돌아보는 명상록에 가깝기 때문이다.

장쉰은 대만 국민에게 존경받는 문인이자 예술가이다. /펄북스

처음 아무것도 모른 채 책을 읽다 보니 글쓴이가 바라보는 방향, 시선이 머무르는 곳,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통찰의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중간마다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길만한 글이 가득했다. 도대체 이 장쉰이라는 사람이 누구지? 찾아보니 올해 71세로 대만에서 국민적으로 존경받은 문인이자 예술가다. 프랑스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소설가, 시인, 화가, 문학평론가, 미학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이 책은 2004년 처음 대만에서 출판되었다가 2010년에 절판, 이후 2013년에 복간됐다. <앙코르 인문 기행>은 2013년 판을 원서로 사용했다.

펄북스에서 이 책을 내게 된 사연도 재밌다. 어느 날 김은경 편집팀장에게 장쉰의 인문여행서를 소개하고 싶다는 메일이 왔다. 여행기라니? 지금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샘플 원고를 읽고 홀딱 반한 김 팀장. 결국 장쉰미학 시리즈로 3권 정도를 출판하기로 결정, <앙코르 인문 기행>이 그 첫 번째 책이 됐다.

펄북스 펴냄, 354쪽, 1만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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