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도 존재의 경중은 없어
갑과 을의 갈등도 결국 허망한 싸움

"집에 들면 노복(老僕) 같고 들에 나면 농부 같고.

산에 나면 목동 같고 길에 나면 고로(古老) 같이.

그렁저렁 수도하여 천하농판 되어 보소.

천하농판 되는 사람 뜻이 있게 하고 보면,

천하제일 아닐런가."

세상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보통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도 있고 보통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도 많다. 보통의 안목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방외유객(方外遊客). 그릇과 틀 밖에서 노는 자유인. 그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없는 농판들이 있다. 밭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일꾼 같고 산에 가축을 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목동이다. 고관대작의 벼슬도 중하고 이름 높은 선비와 학자도 중하고 돈 많은 만석꾼 같은 부자도 중하지만 이름 없고 돈 없고 벼슬이 없어도 이와 같은 무명의 성자가 있어서 세상은 이렇게 균형이 잡히고 용케 굴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라도 완주 땅에 '맨밥'이라고 불리는 머슴이 살았다. 이 머슴은 일찍이 부모조실하고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해서 어느 부잣집 머슴이 되어 살았다. 그런데 왜 맨밥인가 하면 밥 먹을 때 반찬 투정이 없었다. 주면 주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날마다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그 집 살림을 주인보다 더 잘 알았다. 사람들이 그 머슴을 '맨밥'이라고 부르면서 함부로 대했는데 그 머슴이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의 그릇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다.

우리는 해동 고승으로 일컬어지는 원효 스님은 알아도 대안 스님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서산대사나 사명당은 알아도 진묵 스님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안 스님은 원효와 함께 선문답을 나누며 원효를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했던 숨은 큰스님이다. 진묵은 승보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숨은 큰스님이다. 두 어른 다 당대의 형식이나 제도의 틀에 묶이지 않으면서 민초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스님인 듯 속인인 듯 어떤 것에도 걸리고 막힘이 없이 만중과 융화되어 자유롭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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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나 백합 말고도 이름 모를 많은 꽃이 있어서 꽃밭은 아름답다. 소나무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말고도 이름 모를 많은 나무가 있어서 숲은 향기롭다. 현대사회가 많은 좋은 점에도 가슴이 메말라지는 것은 지나치게 있는 자와 없는 자,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잘난 자와 못난 자 사이 깊게 팬 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있다고 힘 줄 것도 없고 없다고 기죽을 것도 없다. 금방이라도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갑과 을의 골 사이 팽팽한 긴장감을 보면서 그 허망한 싸움에 훼방이라도 놓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가 사는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물으면서 밖으로만 향하는 빛을 잠시라도 안으로 돌이켜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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