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존재 이유, 인간다움을 묻는 일
한 편의 독서 통해 고독의 참의미 찾길

동시부터 한 편 읽어본다. "걷다 보니/모르는 데다./몰랐던 이야기가 걸어 나온다."(송선미, '골목' 전문) 정말 그렇다. 이즈음의 날씨가 그렇고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묻는 일이 그렇고 살아갈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고생을 노래방과 산으로 끌고 다니며 폭행하고, 추행한 미성년자들, 새로 산 침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행패를 부리다가 홧김에 아버지와 누나를 죽인 대학생, 가마솥더위를 더욱 실감케 하는 개식용 반대집회까지…. 시와 동시를 쓰는 작가로서 아이들은 "몰랐던 이야기"라고 쓴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너무 끔찍하질 않은가. 아니, 설령 가공된 이야기라고 해도 아이들에게 알려질까 두렵질 않은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현실 즉 생존이라는 문제에 떠밀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잘난 입들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들끓는 시대에선 인간다움을 묻는 일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지점이다. 문학 특히 동시를 비롯한 아동문학의 가치는 더욱 절실해진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떤 인간다움, 한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존재이유를 발견하거나 나아가 창조해야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동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그럴듯한 언어로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거나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허리가 꼬부랑해진 백 살 할머니 속에도 아이는 있다. 그렇다면 '콜레트'의 말처럼 아이들을 위한 문학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 게 맞다. 우리는 그냥 우리 모두를 위해 즉 인간다움을 위해 쓰고 읽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며 동시이며 따라서 문학에는 나이가 없다. 그런데도 아직 동시를 비롯한 아동문학은 철저하게 이상적인 행복과 꿈과 희망의 기록이라 믿는 어른들이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되레 너무나 단편적이고 과격하고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 잃어버린 무엇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사랑의 모든 시간과 장소들인지 모른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묻기 전에 인간에게 '고독'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일까? 먼저 인간임을 한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 이 단어 앞에서 우리는 '읽다', 라는 타동사로 묶이는 사랑과 독서의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다. '파스칼 키냐르'는 독서를 할 때 입술 위에 '읽다'라는 단어를 먼저 갖다 놓는다고 한다. '읽다'는 '혼자 있다'와는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는데 읽기 위해서는 또 혼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서는 우리라는 무리 속에서 실행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함께는 아니란 얘기다. 우리는 관계의 울타리 속에서는 물론 거울 속에서조차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마저 낯설어한다. 행여 당신은 그렇질 않은가? 고독은 나 자신을 낯설게 혹은 새롭게 다시 돌아보는 발견의 시간이다. 시도 때도 없이 SNS를 확인하며 타인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이유 없이 불안을 느끼는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며 덕목인가. 그것은 기계문명의 부품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고 드넓은 우주적 연대 속에서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는 홀로 감당해야 할 고독의 몫이 있다. 바로 이 지점 때문인지 모른다.

김륭.jpg

사랑은 이중의 포옹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침묵에 빠진 언어의 포옹이다. 사랑은 혼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인들은 '영혼 대 영혼'으로 마주할 따름이다. 따라서 사랑은 혼자가 아닌 고독의 형태다. 사랑의 경험과 독서의 경험 사이에는 핵심적인 상응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서운 '열대야'다. 죽은 듯 책이나 읽는 것은 어떨까. 독서란 "내가 되도록 나를 보호하는 법률"이라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 내 뜨거운 살이 될 때까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