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사상 최악 폭염·가뭄, 농민들 시름 깊어가던 차
필리핀서 북상 일본 향해 예상과 달리 제주서 소멸
남부지역 반가운 비 내려…이후 적시에 태풍 이어져

◇지독하게 뜨거웠던 1994년 =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94년은 더웠다. 그 말고 다른 생각은 거의 나지 않는다. 1994년은 4월부터 더웠다. 빨리 교복을 하복으로 갈아 입고 싶다는 친구들의 투덜거림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사막지대 비포장 도로와 다름없는 바싹 마른 길, 버스 문을 열면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4월부터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심상찮았다.

장마가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물론 '기록 상' 장마는 있었다. 1994년 6월 말부터 7월 6일까지 장마가 있었지만 남부지방에 비를 내린 건 다 합쳐도 일주일을 넘지 않았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꾸역꾸역 물을 대 모내기를 했다. 하천, 저수지,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어렵사리 모내기는 했다. 하지만 모내기를 한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기대했던 장마는 얼마 비를 뿌리지도 않고 사라졌다. 농민을 기다리는 건 한국 기상관측 사상 최악의 폭염이었다.

지금도 날씨누리 홈페이지 '기후자료 극값'에 보면 1994년 얼마나 더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4년 7월 20일을 전후해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37~39도를 오르내렸다. 합천은 7월 15일 39.1도, 19일 38.8도, 20일 39.2도를 기록했다. 밀양은 7월 20일 39.4도, 21일 39.2도를 기록했다. 창원은 7월 20일 39.0도, 24일 38.4도를 기록했다. 산청도 7월 21일 39.3도를 기록했으며, 비교적 선선한 지역인 거제가 20일 38.6도, 남해는 20일 37.8도를 기록했다.

1994년 폭염과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진 모습. /대한뉴스

한편, 그해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그해 여름 '더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김 주석이 사망하자 "전쟁 난다", "북한이 망한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돌았고, 서울에서는 김일성 조문을 놓고 폭염 못지않은 치열한 이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7월 중순이 되자 이제 논에 수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됐다. 14살 소년이 보기에도 물이 없으면 올해 농사는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막 방학을 맞은 나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경운기에는 한 짐이나 되는 호스를 실었다. 우리 논으로부터 한 300미터 이상은 떨어진 곳에서 지하수를 퍼내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 논 농수로까지 호스를 이어 물을 보내야 한다. 그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겨우 호스를 수십 가닥 연결해 물을 댔지만 수량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람으로 치면 겨우 입가심할 만큼밖에 안 됐다. 기껏해야 2, 3일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이제 다른 방도는 없다. 비가 와야 한다. 농민들은 역사책에서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면서 비를 기다렸다.

경향신문 1994년 7월 27일 자 1면. /캡처

◇갈지자 행보 끝에 우리나라에 온 월트 = 사람들은 뉴스를 보며 비 소식만 기다렸다. 7월 20일쯤 됐을 때, 이익선 기상캐스터는 날씨 예보 말미에 태풍 하나를 보여줬다. 필리핀 동쪽해상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태풍 월트였다. 예상진로는 실망스러웠다. 일본 열도 남단을 지나 태평양으로 빠지는 것으로 예보했다.

그날 이후로 기상예보 말미에 늘 태풍 소식을 전했지만 태풍은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경로를 택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커녕 일본 열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고 있었다. 그렇게 기대가 실망으로 변해갈 무렵, 23일께 태풍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일본 열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리고 다음날 북서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태풍은 위로 오면서 조금씩 세력이 약해지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우리나라로 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25일께 다시 실망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태풍이 다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진행된다면 일본 열도를 관통해 동해 먼바다로 갈 판이었다. 그런데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26일께 태풍은 다시 북서쪽으로 진로를 틀어 우리나라로 오기 시작했다. 태풍 월트는 규슈 북부 지역을 관통해 대한해협을 거쳐 제주도 인근에서 소멸했다.

이미 월트는 일본 열도를 통과하면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태풍이라 많은 비를 뿌리진 못했다. 그래도 부산에 134.9㎜, 여수에는 60.5㎜의 비를 뿌렸다. 비가 그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태풍 월트 위성 사진.
Walt_1994_track.png
▲ 태풍 월트 이동경로.

◇태풍 덕에 농사를 지은 1994년 =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였다. 1994년은 9월까지 폭염이 지속됐다. 예를 들어 9월 1일 대구가 37.5도를 기록해 9월 기준으로 기상 관측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100㎜ 비로는 농사를 짓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나갔다. 7월 31일부터 8월 1일 사이에는 태풍 '브랜던'이 마산에 98.1㎜의 비를 뿌리고 갔다. 8월 14일부터 16일 사이에는 태풍 '엘리'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스쳐 지나갔다. 이때 호남 해안가에 50㎜ 내외의 비를 뿌렸다.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한 번씩 태풍이 지나가면서 1994년 농사는 흉작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마지막 농사 흉작은 1982, 1983년이다. 그리고 1984년 여름에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에서 쌀 5만 석과 의약품을 남쪽에 지원하기도 했다.

덥고 길었던 그해 여름을 마무리 지은 것도 태풍이었다. 10월 10일 태풍 '쎄스'가 우리나라를 관통하면서 강한 바람과 비를 뿌렸지만 이미 농작물을 모두 수확한 뒤라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서늘한 한기가 교복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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