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연한 병원 응급실 내 폭행·폭언
강력한 법 적용과 인식 변화 필요

'버스 운전기사 폭행, 테러와 같습니다'. 버스에 붙어 있는 안내문이다. 시민 안전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찰은 물론 소방공무원, 운전기사, 의료진까지 많은 이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이들이 폭행에 노출되는 아찔한 상황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지난 1일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폭행당했다. 당시 술에 취한 환자는 자신의 얘기를 듣고 웃었다는 이유로 의사의 얼굴을 때리고 넘어진 의사를 발로 밟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해 각계에서 엄중한 수사와 처벌을 요청했다. 2일에는 경북 울진 한 병원 응급실에서 환자 보호자가 난동을 부렸다. 6일에는 강원 강릉에서 조현병으로 진료받던 환자가 병원에서 망치를 휘두르고 의사를 때린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줬다.

고려대구로병원 응급의학과 이형민 교수가 응급실 종사자 1642명을 대상으로 한 긴급 설문조사 중간 결과에 따르면,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간호사·응급구조사의 97%는 폭언을, 63%는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찰에 신고해 본 적이 있는 응답자는 893명으로 54%에 그쳤고, 이마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119 구급대원 폭행은 지난해 167건 발생했다고 한다. 이틀에 한 번꼴이다. 지난 4월에는 익산의 119 구급대원 강연희 씨가 술 취한 시민을 이송하다 폭행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후 강 구급대원은 3주 정도 후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 받았으나 끝내 숨지고 말았다. 구급대원을 폭행하거나 협박하면 5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소방기본법은 규정하고 있지만, 실형 선고가 잘 내려지지 않고, 이마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관계자들은 이런 '테러'를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강력한 법 개정과 엄격한 법 적용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의료계는 의료인 폭행 처벌 규정과 관련해 반의사 불벌죄 폐지, 폭력·음주에 대한 사회적 대응시스템 완비 등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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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 시민들의 인식도 중요하다. 시민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을 폭행해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 한 사람의 비극으로 그치지 않는다.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폭력에 노출되는 순간 응급 의료 공백이 생긴다. 그에게 생명을 맡겨야 하는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테러' 행위이다. 어떨 땐 폭행한 당사자의 안전도 피해를 당한 의료진, 구급대원, 운전기사에게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운행 중인 버스에서 기사를 폭행해 운전을 못하게 한다면 그 버스에 타고 있는 다른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가해자가 안전할 수 있을까.

오래전 읽은 만화의 한 장면이다. 수술 집도 중인 의사를 평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폭력배가 찾아가 흉기로 중상을 입힌다. 그런데 심하게 피 흘리는 그 의사의 메스 아래에서 수술 받고 있던 환자는 바로 폭력배의 어린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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