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생까지 10명 식구 챙기느라, 쥐치 따고 화장품 외판원 생활
80년대 후반부터 포장마차 운영 "지금도 일할 수 있어서 좋아"
20대 초반 할배 만나 연애결혼…'속도위반'에 결혼식 당일 진통
오전 딸·오후 아들 쌍둥이 낳아

"아이가나, 그때사 수도가 오디 있노. 물도 다 받아가꼬 와야제. 구루마에다 의자며 안주 장만한 거며 바리바리 싣고 끌고 다녔제. 구루마도 귀했던 시절이라 그기 재산이었제. 그때도 요 포장마차가 나래비를 섰제. 나중에는 다 지 자리가 있으니께 구루마라도 포장을 씨아가꼬 요다 딱 묶어두었제."

삼천포 용궁수산시장 근처 포장마차 거리. 100여m쯤 노산공원이 있다. 실내에서 한잔 하다가 문을 나서면 어선이 빼곡히 정박해 있는 삼천포항이다. 나리, 짱구, 호야, 진달래, 대박 등 20여 호나 될까. 이 집들 중 '남해'집 주인장 안점숙(73) 할매. 이곳에서 포장마차를 한 지도 30여 년째다. 1967년 창성호를 타고 이곳 삼천포항으로 들어온 지도 51년째다.

◇이래 봬도 '신식여성'… 고등학교 졸업에 연애결혼까지

안 할매는 1946년생으로 남해군 삼동면 지족이 고향이다. '지족띠기'다. 이름대로 입가에 점이 있다. 그다지 큰 점은 아니지만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 부모님은 바닷가에서 식당을 했다. 큰딸이라 살림을 거들고 식당일도 거들었지만, 부모님은 큰딸을 애지중지했다.

삼천포항 앞에서 30년 넘게 포장마차 장사를 하는 일흔셋 안점숙 할매.

안 할매는 지족초등학교, 남수중학교, 남해수산고등학교(현 남해군 경남해양과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비슷한 세대 여성들이 초등학교도 겨우 갈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로 치면 '신식여성'이다.

"이기 내다. 닮았나? 무신 해양훈련 마치고 찍었을낀데. 우리 학교가 남녀공학이라서 1학년 우리 반 전체가 찍었나 보네."

비닐봉지에 싸둔 옛 사진들을 꺼내는데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흑백 사진이다. 거기엔 여고생 안 할매가 수줍은 듯 단아하게 서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부산에 있는 체신부에 취직을 했다. 부산에 이모 집이 있어 거기서 다닐 수 있었다. 1년 남짓 다니다가 명절이라 집에 와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안 할매 스물하나였고 할배가 스물다섯이었다.

"내가 연애결혼했다 아이가. 울 영감이 요기 삼천포 토박이에다 그때 양복점 재단사였거든. 재단 일을 해서 그렁가 처음 탁 보는데 옷 입은 것도 그렇고 우찌나 멋째이던지…. 그리 보고는 편지 주고받고 틈 나몬 만나러 오고 그랬제."

1966년 재단사였던 남편과 연애시절 노산공원에서 찍다.

안 할매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다. 가난한 집안 장남에 딸린 식구들이 줄줄이였다. 시집가봤자 고생이 눈앞에 불 보듯 훤하다는 거였다. "그런데 내가 아를 가졌어. 요새 사람들 말로 속도위반을 한 거제. 배가 거의 불렀을 때야 우리 어머이가 알고는 기가 차서 난리 치더만. 결혼 날을 서둘러 잡고 식을 올리자 그랬제."

하지만 결혼식 당일, 정작 새 각시는 혼례복을 입지도 못했고 식장에 나서지도 못했다. 각시 없는 결혼식장에서 신랑 혼자서 결혼식을 해야 했다.

"오전 10시에 식을 올릴 건데 그날 새벽부터 산통이 와서 도저히 식이 안되긋더라고. 오전에 딸을 낳은기라. 그래도 식을 올리라꼬 마을 사람들한테 오후 2시로 연기했다고 다 알렸제."

안 할매는 집에서 아이를 낳고 나서 식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겨우시 몸을 추려 우짜든지 일어서보려는데 또 산통이 오는 기야. 오후에 아들을 하나 더 낳은 거제. 얼라가 쌍둥이였던 기라. 요새는 아 밸 때부터 다 알지만 그때는 쌍둥이인가 알 수가 없다 아이가. 낳아봐야 아는 긴께네. 운제 아가 나오는지도 알 수 없꼬."

한동안 안 할매네 결혼식은 온 동네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결혼식 날 태어났던 쌍둥이 중 아들은 스물여덟 살 되는 해 죽었다.

"살아있으몬 쉰하나일 낀데. 무다이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어. 생떼 같은 내 자식, 다 키워놓았더니…."

화장품 외판원을 하던 시절 부곡하와이에서.

◇밀가루 배급 타 먹으며 쥐치 따고 외판원도 하고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새댁 시절부터 힘들었다. 예상대로 '고생바가지'였다.

"시집을 갔더니 시동생들이 줄줄인데, 막내 시동생이 국민학교 댕기더라고. 울 아그들 키우면서 시동생들 챙기고 집안 살림을 살아야 했어."

재단사 남편 월급으로 10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먹고살기에 빠듯했다.

"굶기도, 굶기도 참 마이 했제. 자랄 때는 그리 굶지는 않았는데 시집와서는 우찌 그리 물 끼 없는지. 동사무소 가서 밀가리 배급도 탔으니께. 그걸로 수제비 끼리 묵고 그랬제."

시집와 두 해나 지났을까.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아 놓은 아지매헌테 일자리 줄 데가 오디 있겄노. 쥐치 따러 갔어. 삼천포 쥐포가 한창 잘나갈 때여 가꼬. 일본으로 수출도 할 끼라고 그럴 때였는 기라. 그러다가 화장품 외판원도 하고…. 와, 가방 메고 두 사람씩 댕기몬서 잘사는 집 아지매들한테 마사지도 해주고 화장품 팔던 거 기억나제? 아모레 화장품. 젊을 때는 그거도 몇 년 했제."

안 할매는 먹고살려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재단사였던 할배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기성복이 쏟아지자 결국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뒤 돈을 털어 다른 일을 이거저거 벌였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우리 영감이 사람은 차암 선한데, 일이 안 풀리더라고. 아이엠에프 때도 뭘 하다가 다 날리고…. 열심히 해도 그런 거라몬 그거야 우찌 할 수 없는 거 아이가."

1963년 남수고교(현 경남해양과학고교) 1학년 2반 시절. 사진 맨뒷줄 오른쪽에서 다섯째.

안 할매가 온갖 일을 다 하다가 포장마차를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시누가 하던 걸 내보고 해보래서 시작했제."

안 할매가 장사를 시작할 때는 주변 환경과 시설이 지금과 천지차이였다.

"밤에 문을 여는데, 불이 없어. 전기를 가져올 때가 없으니께. 카바이트라꼬 그걸로 불을 밝혔제. 그것도 충전한 기 다 떨어지모는 저게 철공소에 가서 충전해왔제. 물은 양동이에 받아와가꼬 설거지도 겨우시 했다. 그랑께 집에서 다 장만 해가꼬 오고…."

지금은 삼천포항 일대를 관광지역으로 살리면서 바로 옆에 용궁수산시장 건물도 들어섰고, 포장마차도 실내 점포로 꾸미고, 수도 전기도 잘 들어온다. 집집이 동그란 간판도 달았다. 공중화장실도 따로 설치돼 있다.

이곳 포장마차 거리는 오후 6시면 장사를 시작해 용궁수산시장이 문을 닫는 8시 무렵이면 더욱 활기를 띤다. 손님이 늦게까지 있을 때면 새벽 1시도 훌쩍 넘어야 문을 닫는다.

"옛날에는 밤 12시가 넘으면 단속을 허니께 무조건 12시 전에 마쳐야 되는 기라. 12시 넘었삐몬 단속 순경들이 포장마차를 가져갔삐. 그라몬 다음날 파출소 보관소 가서 사정사정해서 가져왔제. 지금이사 손님만 많으모는 밤새도록 해도 되지." 안 할매는 일흔셋이 되도록 자신은 아픈 데 없이 건강하다며 지금도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요새 다들 공무원 좋다카지만 60되몬 못하제. 이거는 정년이 없어. 내가 팔다리만 멀쩡허모는 할 수가 있으께네. 자식들한테 손 안 벌려도 되고. 인자 집 사니라 은행 대출받은 것 갚아 감시 우리 영감이랑 묵고살몬 되제."

/글·사진 시민기자 권영란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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