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생상스 작곡 교향시, 김연아 무대서 사용해 친숙
인상적인 선율로 점차 고조, 클래식서 다룬 '죽음'다양
환자-의료진 뒤바뀐 병원…인권 유린 등 돌아보게 해

겨울에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외진 곳의 한 정신병원. 그곳에 졸업을 위해 마지막 단계를 거쳐야 하는 옥스퍼드 의대생 에드워드가 도착한다. 뭔가 의심스러운 행동의 병원장 램을 대면하고 아름다운 여인 일라이저를 만나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병원을 점거한 정신병자이고 병원을 운영하던 간호사들과 병원장 벤자민은 지하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야기의 전개로 보아 뭔가 음울한 음악 하나쯤 깔려야 할 듯하고, 이에 해골의 춤을 묘사하는 곡이 등장하는데, 이는 프랑스의 모차르트라는 찬사를 받는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ens)의 작품이다.

19세기를 떠나 보내고 20세기를 맞이하는 잔치의 날. 그들은 함께 춤추고 낡은 것을 태워버리려는 의식을 준비한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그들의 무도회.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Camille Saint-Saens, Danse macabre, Op.40)이다. 국민 스케이트 요정 김연아가 쇼트프로그램 곡으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친근해진 곡이다. 이러한 이벤트가 하나의 곡을 알리는 데 얼마가 효과적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교향시는 모두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제목에 맞는 장면이나 느낌을 묘사하는 표제적인 음악으로서 헝가리의 작곡가 리스트에 의하여 정립된 클래식 장르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 역시 프랑스 시인 앙리 카잘리스의 시를 바탕으로 흘러가는 표제적 교향시이다.

서로에게 빠져드는 에드워드와 일라이저, 일라이저는 그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에드워드는 이전부터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접근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스틸컷·캡처

'지그, 지그, 지그, 죽음의 무도가 시작된다/ 발꿈치로 무덤을 박차고 나온 죽음은/ 한밤중에 춤을 추기 시작한다/지그, 지그, 재그,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중략)/하지만 쉿! 갑자기 춤은 멈춘다/서로 떠밀치다 날래게 도망친다/ 수탉이 울었다/아, 이 불행한 세계를 위한 아름다운 밤이여!/죽음과 평등이여 영원하라!'

곡은 해골들을 일으켜 세우는 바이올린의 인상적인 선율로 시작되었다가 스페인풍으로 휘몰아치며 점차 고조되어 나간다. 죽음은 바이올린의 선율에 이끌린 듯 광란의 춤을 추는 장면을 보여주다 생상스의 또 하나의 걸작 '동물의 사육제' 중 '암탉과 수탉' 주제의 등장으로 아침을 알리는 센스를 보여주며 조용히 마무리된다.

'죽음의 무도'는 카미유 생상스의 대표적인 교향시다. 김연아 선수가 사용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클래식 음악에서 자주 모티브가 되어 왔다. 많은 회화와 소설에서도 그랬듯 음악에서도 이 주제는 비켜가기 어려운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자 삶의 일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헝가리 작곡가 리스트의 '죽음의 춤'(TOTENTANZ),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시벨리우스의 '비극적 왈츠'(Valse triste),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등이 있으며 '민둥산의 하룻밤'은 쌍둥이처럼 그 표제적 내용이 '죽음의 무도'와 닮았다. 그리고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오제의 죽음'은 일본에서 쓰나미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창원시향이 정기연주회에서 '오제의 죽음'으로 그들을 위로했었다. 당시 연주를 위하여 등장하는 지휘자를 향해 박수가 쏟아질 때 제지하던 지휘자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지하에 감금된 병원장, 그 역시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인권 유린을 자행한다.

덧붙여 주목할 점은 영화가 음악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작품에 삽입된 왈츠를 눈여겨볼 만하다. 이 영화에 사용된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그러하고 영화 <텔 미 썸씽>, <번지 점프를 하다> 등 비극적이거나 암울한 분위기의 국내 작품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흐른다. 명작 <올드보이>에서는 서글픈 클라리넷의 선율 라스트왈츠(Last Waltz)가 녹아 있다. 연인들의 춤이자 밝고 화사함을 특징으로 하는 왈츠가 죽음을 모티브로 한 장면이나 비극적인 대목에서도 잘 어울린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려진 병원. 에드워드와 일라이저는 함께 사라졌으나 인권 유린을 일삼던 병원장은 자리에 복귀했으며 지하감옥에서 구원의 손길을 부탁하던 간호사도 자신의 일로 분주하다. 가짜 병원장 역할을 수행하던 램도 이제는 정신병자인 제 위치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전이 있는 영화의 결말이 전개되고 모두가 놀란다. 에드워드가 누구인지, 왜 그 병원을 오게 되었는지. 이때 체스를 두고 있던 램은 외통수(체크메이트)에 걸려 버린 그들을 비웃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치료와 연구라는 미명 아래 한 여인의 인권을 유린한다.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짓밟히는 그녀는 일라이저다. 교수의 행동이 불쾌감을 주었다면 그의 강의를 로봇처럼 공책에 적어 나가는 학생들의 서걱거리는 연필 소리는 서늘한 공포를 안겨준다. 누군가는 큰소리로 그녀의 인권을 부르짖어 줄 것이라는 희망이 서걱서걱 사라져 갔다.

영화의 배경은 19세기 말이다. 그 시절은 기술과 의학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인권이 유린당하던 시대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현재의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니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말한다면 차라리 누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에서는 정상인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환자에게 고문에 가까운 실험을 일삼는 대학교수와 병원장 벤자민은 현재 우리가 보기에도 더 정신병자에 가깝다. 반면 가짜 병원장 행세를 하는 램은 군의관 출신으로 전쟁터에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가망 없는 병사들을 보다 못해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 하나 실패한다. 결코 잘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긴 해도 왠지 더 인간적이다. 또한 그는 과학이 아닌 마음으로 환자를 보살피기를 에드워드에게 가르친다.

대학 강단에서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인권을 유린당하는 일라이저(왼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정상인이란 칭호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왠지 미쳐 보인다. 더 잘하려고, 더 빠르도록 채근하면서 정작 타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그럴 틈이 없다.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과연 정상인가? '좀 느리면 어때'라고 한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고 '조금 못해도 돼'라고 하면 바보 같아 보일 것이다. 영화에서 정신병자와 병원 관계자들의 처지가 바뀌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정상과 정상이 아닌 것이 뒤바뀐 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무섭고 불안하긴 해도 램에게 부탁하고 싶다.

"램, 다시 병원을 맡아주세요!"

/시민기자 심광도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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