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로 잃어버린 어쩌면 지금 창원의 문화자산
주거지 조성사업·도로 건설 등 거치며
소답동 한옥마을·영모재 '역사 속으로'
김해 김씨 종가 사미루·구문정도 분리

지금 창원은 누가 봐도 현대적이고 산뜻한 도시다. 너른 평지 위에 바둑판처럼 가지런한 주택가와 공단, 질서정연한 도로와 이에 맞는 조경 등 호주 캔버라를 모델로 설계한 계획도시인 까닭이다. 하지만, 역사 유적으로 보면 창원은 잔인한 도시였다. 1970년대 초 창원기계공업공단을 만들 때다. 공장 용지를 만들면서 역사 오랜 마을과 이를 둘러싼 구릉들이 사라졌다. 이 와중에 선사시대 문화재인 성산패총과 변한시대 철을 생산하던 야철지가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다. 이를 기계공업의 상징으로 삼자는 발굴팀의 눈물겨운 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개발독재가 시작된 시기였고, 지금보다 문화 유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였다.

한때 번창하던 창원 소답동 한옥마을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아쉽다, 소답동 한옥마을

창원은 크게 보면 창원대로를 중심으로 절반은 공단, 절반은 주택가다. 주택가 지역에서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 창원공단 배후 주거지 조성을 위한 대규모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벌어졌다. 옛 창원군의 중심이던 명곡동, 중동, 소답동, 도계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300여 년에 걸쳐 형성되었던 소답동 김해 김씨 삼현파 한옥마을도 사라진다.

당시에는 그 많은 한옥이 그저 낡은 집들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종가(宗家)만 남게 됐는데, 이마저도 집 한가운데로 도로가 나버린다. 지금 조각가 김종영 선생의 생가로 불리는 김해 김씨 종가 본채와 길 건너편에 있는 종가 별채 사미루, 구문정이 분리된 이유다. 도로 건설은 그리 오래지 않은,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이다. 도로가 날 당시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울대 미대 김종영 선생의 동문들이 창원시에 생가를 그대로 유지하게 해달라고 탄원서도 냈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적인 가치보다 도시계획이 더 강력하던 때였기에 소용이 없었다.

창원 소답동 김해 김씨 재실 영모재. 2000년대 들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빌라가 들어섰다. /김세욱

◇흐지부지 없어진 소답동 영모재

아쉬운 게 또 있다. 이미 여러 자료에서 문화재로 기록된 소답동 영모재(永慕齋)가 2000년대 흐지부지 사라진 일이다. 영모재는 지금 김종영 생가가 만들어진 1926년보다 10년이나 이른 1915년에 세워졌다.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소답동에 김해 김씨 한옥마을을 이룩한 창원 선비 모연 김영규(1857~1931)가 집안 재실로 지은 것이다. 이곳에서 때때로 명망 있는 문인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벌이기도 했다. 구한말 학문과 시가로 유명했던 함안 선비 일산 조병규가 "사정을 새로 지으니 앞 세대보다 빛나고 빈 재실에는 바람 가득하고, 냇물엔 달빛 가득하네"라고 영모재에서 읊은 시가 지금까지 전한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영모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빌라를 지었다. 개인 재산이기에 어떻게 하든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근대 문화 유산 하나가 허무하게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도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 영모재가 창원시 소답동에 있는 문화재로 검색된다.

1995년 발행된 <창원시 문화유적 정밀지표조사보고서>에는 당시 막 사라지기 시작한 소답동 한옥마을에 대한 안타까움이 표현돼 있다.

"옛 창원군 중심지였던 소답동에 김씨 고가 사미루 등 우리 전통가옥이 남아 있으나 주변 지역 신도시 개발 속에 전통 가옥이 훼손 멸실될 지경에 이르러 이곳을 조사하는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소답동 한옥마을이 지금까지 남았다면 아마도 창원 전통을 상징하는 유명한 관광지가 됐지 않을까.

창원시 소답동 김해 김씨 종가 별채인 사미루와 구문정. 도시계획에 따라 본채인 현 김종영 생가 사이에 도로가 나면서 억지로 분리되어 버렸다. /이서후 기자

◇창원 문화사 몇 가지 기록 고증 필요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게 두 가지 있다. 우선 6회에서 자세히 다뤘던 창원 지역 문화 일꾼 김종하(金鍾夏·1936~2002)와 관련해서다. 1994년 발행한 <창원군지>와 1997년 발행한 <창원시사> 기록에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창원군지> 제9편 문화예술과 체육 편 현대 미술 항목에 있는 다음 문구를 보자.

"창원문화제는 당시 마산 중심의 지역문화에 또 다른 활력을 부여하며 지역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 낸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매년 11월 치루어진 창원문화제는 이 지역의 또 다른 축으로서 최운, 유택열의 양화와 진종만의 도자기, 그리고 박성윤(전 창원시교육장), 변지섭, 창원문화제의 실무주역으로서 창원군지를 만들기도 한 김종하, 김종문…(하략)"- 1342페이지

이어 <창원시사> 문화예술 편 현대미술의 흐름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창원문화제의 실무 주역을 맡기도 하고 창원군지를 만든 金宗河(김종하)는 서체에 능통하였다." - 500페이지

이 기록들에는 창원문화제 실무 주역인 김종하(金鍾夏)와 근현대 창원 유학자 유당 김종하(金鍾河)가 뒤섞인 듯하다. 창원문화제 실무 주역인 것은 김종하(金鍾夏)가 맞다. 하지만, 창원군지를 만들고 서체에 능통한 것은 유당 김종하(金鍾河)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자마저 틀린 것이다.

이처럼 오류로 보이는 기록들이 <창원군지>에서 <창원시사>로 별다른 교정 없이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창원군지> 문화예술과 체육 편 중 1920~1930년대의 문학 항목에 나오는 기록이다.

"1938년 이 지역 최초 문학잡지가 권오익에 의해 발간되는데 제호는 <모연정기(慕淵停記>로 지령은 3호였다."- 1325페이지

일단 이름부터 <모연정기>가 아니라 <모연정지(慕淵停誌>가 되어야 맞겠다. 2회에서 소개했듯 모연 김영규를 추모하는 이들이 만든 문집이다. 권오익이 소화 12년(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 발행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것이 창원 최초 문학잡지인지 또 지령이 3호인지는 정확히 살펴봐야겠다. 다행히 <창원시사>에는 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이후 다시 창원시사를 편찬할 때 이 두 부분을 정확히 고증하면 좋겠다. 

※참고문헌

<창원시사>(창원시사편찬위원회, 1997) <창원군지>(창원군, 1994) <창원시 문화유적 정밀지표조사보고서>(창원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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