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설움 뒤로하고…그 맛 제대로 익어가네
주조 금지령 등 위기 거쳐
다양성 줄고 설 자리 잃어
최근 민간서 복원 움직임
"단순한 알코올 음료 아닌
고유의 문화 내포한 자산"

비가 오면 판에 박은 듯 따라붙는 것이 '술'이지 않을까. 비 오는 날도 술을 마시려는 술꾼의 오랜 변명일지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맞춰 기울이는 술잔은 고유한 정취가 있다. 술에 정해진 계절이 있겠느냐마는, 여름 장마철을 빠트리면 섭섭하다.

◇잃어버린 100년

한국에서 으레 비가 올 때 찾는 술은 '막걸리'다. '탁주'라고도 불리는 이 술은 농민과 노동자가 즐겨 찾는 노동주였다.

막걸리 주재료는 멥쌀인데, 멥쌀이 알코올로 변하려면 다른 성분이 꼭 필요하다. 바로 '누룩'이다. 술과 관련한 위대한 발견 하나를 꼽으라면 누룩을 빼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탁주가 서민의 술이라면, '약주'는 양반의 술이었다. 양반가는 제사나 손님을 맞을 때 쓸 술을 직접 만들었다. 탁주보다 투명에 가까운 술로, 약재를 넣어 빚기도 하여 약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통주 이야기' 발효실 모습. 이곳에서는 발효실 공간을 두 개로 나누어 온도를 달리한다. 허승호 씨가 이불로 덮었던 술독을 보여주고 있다. /최환석 기자

탁주와 약주는 19세기 말 조선에서 일본식 청주를 생산하던 일본인도 높게 평가한 조선주다. 약주는 19세기 말 이후 음식점이나 양조장에서도 만들어 판매했고, 탁주도 식민지 초기까지 술집이나 가정에서 신고만 하면 직접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다, 여기 언급하지 않은 청주·증류식 소주·혼성주 등을 포함하면 한국의 전통주는 다양성만큼은 으뜸이었다. 한데 지금 한국의 술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전통주가 아닌 혼합식 소주다. 그 까닭에는 한국 전통주의 '잃어버린 100년'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9년 주세법이 발효하면서 전통주 통제가 시작됐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기존 주세법을 개정한 주세령을 발효했는데, 더욱 엄격한 통제가 이뤄졌다. 제조면허가 있어야만 술을 만들 수 있도록 하면서 한국 전통주는 서서히 다양성을 잃게 됐다.

여기에 더해 약주는 일본 청주가 한반도에 등장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옛 마산 등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에는 어김없이 일본인이 소유한 양조장이 들어섰다. 마산에서 생산한 청주는 따로 '마산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에서 일본 청주를 '정종'이라 잘못 부르게 된 까닭도, 일본 청주 회사의 상표가 인기를 끌면서다.

주세령으로 술을 만들려면 면허가 있어야 했기에 제조에 비용이 많이 드는 약주는 서서히 변질했다. 재료비를 아끼려고 찹쌀·멥쌀이 아닌 다른 것을 섞기 시작한 것. 결국 '약주'라는 이름이 무색한 상황이 연출됐다.

단양주(뒤)와 이양주. 이름 그대로 한 번 빚은 술과 두 번 빚은 술을 뜻한다. 35일 발효한 이양주는 복숭아꽃을 첨가하여 향을 달리했다. /최환석 기자

탁주는 주세령에도 생산량이 계속 늘었다. 생산하는 곳도 많고 양도 많아 주조법을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았다. 탁주 위기는 약주와 달리 해방 이후에 찾아왔다.

1946년 미군정청은 막걸리 주조 금지령을 내렸다. 한국 식량 사정을 고려한 제재였으나 식민지 시대에도 없던 주조 금지령에 반발이 컸고, 밀주도 성행했다. 이후에도 1963년 탁주 제조 원료 등에 쌀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와 1966년 멥쌀 사용 전면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탁주는 본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이때 100% 밀 막걸리가 생산됐다.

1977년 재무부 고시로 이전 고시가 폐지되면서 쌀 막걸리가 부활했으나 밀 막걸리에 길든 입맛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서민들은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데 값싸고 독한 희석식 소주를 애용한 지 오래였다.

◇전통주 부활 신호탄

최근 들어 한국 전통주에 관심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막걸리는 2000년대 후반 한 차례 대성황을 이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민속주라는 이름의 약주를 표방한 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업성이 중심인 이들 술을 온전히 한국 전통주라 부르기엔 다소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전통 문헌을 바탕으로 전통주 복원이 민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일본식 누룩을 쓰지 않고, 한국 전통 방식의 누룩이나 전통을 개량한 누룩을 쓰면서 전통주 복원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창원시 의창구 북면에 '전통주 이야기'라는 공간이 마련됐다. 이곳을 운영하는 허승호 씨는 전통주 연구가 박록담 선생이 운영하는 한국전통주연구소 전통주 특별 지도반 과정을 마쳤다.

이달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할 이 공간에서 허 씨는 직접 전통주를 빚는다. 널찍한 공간 한쪽 각기 온도가 다른 공간 두 곳에는 허 씨가 직접 빚은 전통주가 익고 있었다. 이 공간은 전통주를 빚는 개인에게 공유할 생각이기도 하다.

술 맛을 보려면 예약을 하고 찾아야 한다. 취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배제하고, 전통주의 맛과 향을 즐길 사람만을 받길 원하는 까닭이다. 7월 말께부터는 전통주 관련 교육도 시작할 계획이다. 단순히 전통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겠다는 의도다.

오롯이 멥쌀, 찹쌀, 누룩, 물로만 술을 빚는 허 씨는 전통주를 표방하는 시중의 일부 술을 "라면수프 넣은 술"이라고 표현했다. 시판 막걸리는 대체로 인공 감미료인 '아스파탐'을 쓴다. 상품성을 유지하려는 선택이지만, 반대로 제대로 맛을 내지 않고도 소비자의 거부감을 없애는 속임수로 쓰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에 '전통주 이야기'라는 공간을 마련한 허승호 씨. /최환석 기자

몇몇 잘못된 선택은 소비자의 입맛을 속이고, 결국 한국 전통주의 부활을 막는 걸림돌이 되는 셈이다. 허 씨는 "청주 개념인 동동주도 실제 익으면 쌀이 가라앉는다"며 "막걸리에 쌀을 띄운 것을 동동주라고 속여서 파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주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어렵지만, 100년의 잠을 깨우는 과정"이라며 "전통주는 단순한 알코올 음료가 아니라 고유의 문화를 내포한 까닭에 복원 과정은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주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2%가량의 시장 점유율을 봤을 때는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허 씨는 "진정한 한국 전통주가 늘어나면 시장 점유율도 5%까지 올라갈 수 있다"며 "그런 과정을 거치면 분명히 한국 전통주를 대표하는 명주가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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