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독립만세" 울려퍼지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남도청 이전 반대 운동

1920년대 초반 일제는 경남도청 이전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 경남도청은 진주에 있었다. 이것을 부산으로 옮기려고 했다. 일제가 도청 이전을 추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경상남도는 당시 일제에게는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에게는 한반도 모든 지역을 상실해도 경상남도와 부산만큼은 잃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부산이 핵심이었다. 다음으로 부산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도시가 팽창해 항만뿐 아니라 교통과 산업,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주는 서부지역의 중심인데, 서부경남지역은 지리산과 인접해 항일의병도 잦았을 뿐 아니라, 반일 정서도 동부경남 보다 비교적 강했다. 따라서 일제는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경남도청 이전설이 들려오자 순식간에 진주시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4년 진주시민들이 7월 16일 궐기대회를 열고 조선총독부를 성토했다. 진주시민들은 궐기대회를 통해 총독부와 교섭할 교섭위원을 선임하고 총독부에 진정을 신청했다. 진주시민 교섭위원들은 총독과 총독부 정무총감, 총독부 내무국장을 만났다. 진주시민들의 궐기에 놀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상부(일본 정부)에 이전할 의향이 없음을 상주하겠다. 게다가 예산도 없다"고 달랬고, 총독부 내무국장도 "도청 이전은 절대로 반대한다. 누가 이런 말을 퍼뜨리는가?"라며 교섭위원에게 되묻기까지 했다.

또한 총독과 간부들은 당시 진주 남강을 가로지르는 가교를 속히 지어주겠다면서 교섭위원들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부인에도 경남도청 이전설은 가라앉지 않았다. 경남도청 이전을 예상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에 진주시민들은 1924년 8월 14일 실행위원을 정하고 8월 18일 모든 상점을 철시하고, 농악을 울리며 오후 3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실행위원들은 와다 준(和田 純) 경남도지사를 찾아갔고, 와다 도지사도 "전혀 사실무근인 허위 보도"라고 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미 부산에 도청 부지까지 선정된 상태였다.

123.jpg
▲ 진주성내 시장 모습.

결국 1924년 12월 8일 관보에 경남도청 이전이 공고됐다. 일제는 "진주는 경상남도의 서쪽에 있어 전체 경남의 경제문화의 중심이 아니며, 교통이 불편하고, 과거와 달리 각종 업무가 복잡한 시대에 도저히 현상대로 할 수 없어 이번에 총독의 영단으로 이전한다"고 밝혔다. 또한 진주시민을 달래기 위해 도청 외에 재판소, 경찰서, 자혜의원(공립병원) 등 대부분 공공시설은 기존과 같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년(1925년)에 진주~마산 철도를 개통하겠다고 했다.

관보에 이 사실이 게재되기 전 1924년 12월 7일 와다 도지사는 지역 유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것이 삽시간에 시민들에게 알려져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진주시민 가운데 일부는 '적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12월 9일 밤 300여 명이 붉은 깃발을 들고 각 공공기관을 습격하려고 했다.

12월 11일 오후 3시, 진주시민대회를 열고 일제 당국에 대해 낱낱이 비판했다. 일단 이들은 지난 8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안심하라고 한 것에 대해 비판하고 총독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총독 비서실에서는 면회가 어렵고, 총독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고 발뺌했다.

또한 당시 일제는 경남도청 이전 전에 여론을 조사했다. 당시 경남도청 이전을 반대하는 곳은 진주, 마산, 창원, 통영, 고성, 사천, 함안, 의령, 창녕, 합천, 산청, 함양, 거창, 남해지역이었다. 반면 찬성하는 곳은 부산, 울산, 양산, 동래, 김해, 밀양이었다. 당시 반대 측 지역 인구를 합하면 130만 명이었고, 찬성 측 지역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이어 시민 측 대표위원이었던 김갑순 씨는 "총독부에서 이 문제를 없던 일로 하지는 않겠습니까만, 우리는 적어도 1부 14군 지역 130만 명은 총독정치에서 제외된 줄로 안다고 총독부에 전했다"고 했다.

'총독부로부터 배제된 130만 명'을 슬로건으로 내 건 진주시민들은 시민대회 이후 더욱 거세게 당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남강교와 가교를 부수자 일제는 무장경찰을 급파해 시민들과 대치했다. 와다 도지사는 병을 칭하고 경찰의 호위 아래 관사에 몸을 숨겼다.

11일 오전에 도지사와 면회가 좌절되자 시민들은 "진주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규모 집회를 일으켰다. 시민들은 총독을 만나고 온 진정위원들을 비판하며 "무슨 명목으로 다시 진주에 돌아왔냐"고 따졌다. 11일 밤 '적심단' 별동대는 다시 남강교를 파괴하려 했으나 이미 이들의 행동을 예상한 일본 경찰에 의해 좌절됐다.

123.jpg
▲ 진주 관사.

12일 아침, 일제 당국은 '무조건 해산'을 시위대에 명령했다. 일단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진 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동여맨 후 농악대를 앞세우고 붉은 깃발을 날리며 곳곳에서 산발적인 집회를 이어갔다. '적심단'이라 칭했던 이들은 스스로 '결사대'로 이름을 바꾸고 각 집회 장소를 돌며 집회 열기가 식지 않도록 했다. 한편 이날 변호사 사무실과 사립학교와 모든 상점(음식점 제외)은 문을 닫았다.

12일 오후 진주시민들 가운데 청년 1400명과 진주 시내에 살던 일본인 200명 등 약 1600명은 대회를 열고 일본 가토 다키아키 총리에게 직접 탄원을 하기로 했다. 또한 일제 당국에 맞서지 못한 진주 시내 18개 면 면장들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또한 진주시민들은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경남도청 이전방지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상무부, 신문계, 회계계, 지방부, 방수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방선전대를 만들어 제1대는 산청, 함양, 거창을, 제2대는 합천, 의령, 함안, 제3대는 고성, 통영, 제4대는 삼천포, 남해, 하동에 파견했다. 이들은 진주시민들의 뜻을 전하고 진주시민들처럼 군민대회나 상점철시 등을 하도록 유도했다.

한편, 진주시민들은 부산사람들에 대한 적개심도 드러냈다. 마산을 오가는 자동차에도 부산 사람은 태우지 말도록 했으며, 혹시 탑승한 승객에게는 "마산에서 내리지 않고 진주에 가면 맞아 죽는다"고 경고를 하도록 했다. 일부 지역에는 '부산 사람이면 불문곡직하고 때린다', '때려죽인다'는 경고문이 나붙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기사에서 "진주 성내는 죽은 시가와 같이 보이고, 사람들은 대개 빨간 수건으로 두른 것이 보인다. 결사대원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본 기자를 살기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고 했다. 한편, 진주지역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매일신보>, <조선민보> 지국은 도청 이전에 적극 반대하고 조선총독부의 명백한 실정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시민들은 언론 중 일제 편을 드는 <매일신보>, <부산일보(일본어)>, <경성일보> 등을 보지 않기로 했다. <동아일보>는 12월 15일 진주시민들의 반대 운동을 모아 호외를 발간하기도 했다.

13일에도 진주시민들은 부산 방면의 교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남선교를 파괴하기로 했으나 경찰에 막혔고, 지역별 면사무소로 행진해 면장 및 직원들의 사직을 종용했다. 이에 일부 지역 면사무소는 면장 이하 모든 직원들이 사무소를 비우고 대피하기도 했다. 한편, 시민들 가운데 온건한 세력이었던 교섭위원들은 도지사와 협상을 하였다. 도지사는 그날 밤 서울 조선총독부로 갔다.

14일에는 부산으로 향하는 모든 화물은 취급하지 않았고, 상인들도 부산과 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어 12월 중순, 마산과 하동 등에서도 군민대회를 열어 일제 당국을 비판하고 부산과 거래를 하지 않기로 하는 등 진주 외 지역에서도 호응이 잇따랐다.

1924년 12월 25일 진주에서 '경남도민대회'를 열었다. 진주시민 1000여 명과 인근 지역에서 온 유지 33명이 참석했다. 당시 유지들은 마산 7명, 창원 1명, 산청 5명, 하동 3명, 함안 1명, 군북 1명, 남해 2명, 고성 2명, 함양 3명, 사천 2명, 곤양 2명, 합천 2명, 안의 2명 등이었다. 일제 경찰은 이 대회 이름을 '경남도민대회'라 쓰지 못하게 하고 '경남유지대회'라고 고치도록 요구했다. 이어 일제는 진주시민대회를 금지하면서 탄압 국면에 들어갔다.

일제의 탄압이 들어오자 반대운동의 한 축이었던 진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반대운동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경남도청 이전방지회'는 해체하고 '진주부흥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타협에 들어갔다. 진주부흥회는 1925년 2월, 일제 당국으로부터 21개 항에 달하는 지역발전 약속을 받고 집회 및 저항운동을 멈추기로 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결국 1925년 4월 1일 경남도청은 진주를 떠나 부산부 부민정 2정목(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에 있던 자혜병원 신축 건물로 이전했다.

진주시민들의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3·1운동 이후 식어가던 지역 공동체 의식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또한 단지 진주시민 만의 운동이 아니라 진주를 거점으로 한 타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00년 전엔 이름도 없었던 부산의 성장

1896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상남도가 만들어질 때만 하더라도 부산이라는 행정구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부산 시내 대부분은 동래부 소속이었고, 해운대와 기장군 일대는 '기장군', 현 금정구, 북구, 사상구, 사하구 일대는 '양산군'에 속해 있었다. 강서구와 사상구, 사하구 일부 지역은 '김해군'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하자 한반도의 관문인 부산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부산 지역은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나눠지게 된다. 부산부는 지금의 영도구, 중구, 서구, 동구 일대였고 나머지 현 부산광역시 대부분 지역은 동래군 소속이었다. 김해군은 오히려 '영토'를 넓혀 강서구와 사상구, 사하구 전역이 김해군에 속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거듭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부의 면적은 갈수록 넓어졌다. 해방 직전에는 부산진구, 연제구, 동래구, 수영구, 해운대구 일부 지역까지 면적을 확대했다. 동래군은 사상구, 북구, 금정구 일부, 기장군 지역을 맡았다.

123.jpg
▲ 부산에 있는 구 경남도청,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기장군과 강서구 지역을 제외한 현재 부산광역시 대부분을 관할하게 됐다. 동래군은 현 기장군 일대만 관할하는 작은 군으로 전락했다.

1978년 다시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드디어 낙동강을 넘어 강서구 지역까지 면적을 넓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녹산과 가락지역은 아직 김해군 소속이었다. 이때 드디어 동래군이 소멸되고, 기장군 지역은 양산군에 속하게 됐다. '동래'라는 이름은 부산 시내 행정구 이름으로 전락했다.

1989년 더욱 서쪽으로 면적을 넓혀 현재 강서구 면적을 완전히 확보했다. 1995년 부산광역시로 되면서 기장군을 편입함으로써 근 80년 만에 초기 부산부 면적의 수십 배가 넘는 면적을 얻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1924년 8월~1925년 4월 기사

- <부산역사문화대전>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