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의 추억

내가 페이스북을 처음 시작하고 나서 내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2274197192) 대문에는 한동안 노란색 바람개비가 줄지어 있는 길 사진이 걸려 있었다. 김해 봉하마을 들머리 사진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면 있는 사진이다. 봉하마을과의 인연이랄까. 여러 시기에 나는 봉하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강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다.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는 '길' 그 자체를 좋아한다. '길'과 '삶'이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곧은 길, 꼬부라진 길, 매끈하게 포장된 길, 울퉁불퉁한 길, 갑자기 끊어지는 길, 가파른 오르막길,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길, 주변에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메마른 길….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존재하고 인간의 '삶' 또한 그러하다. 나는 스스로 '삶'의 행로를 더듬어가고 있는, '길' 위에 선 눈 어두운 여행자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길과 바람개비가 어우러진 그 사진을 좋아했었다. 물론 내가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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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을 안까지 도로변에는 노란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나에게는 이 바람개비가 봉하마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봉하마을 노무현 기념관 앞 구석에 세워둔 스쿠터와 노란바람개비가 잘 어울린다. / 조재영 기자

 

자동차 Vs 오토바이

우리 신문사 편집국 근무자 중 내근 기자들은 금요일과 토요일 쉬고 일요일 출근한다. 편집국 외근 기자들은 금요일 출근해서 일을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쉰다. 공식적으로는 외근 기자들도 내근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금요일과 토요일 쉬어야 하지만 일요일 대부분 출입처가 업무를 하지 않아 취재가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해 그렇게 한 것이다.

경제부 데스크를 맡고 있는 나는 금요일과 토요일 쉰다. 금요일은 대체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고 토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려 노력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모터사이클을 타는 지인들과 1박 2일 투어를 할 때는 일요일 하루 휴가를 낸다.

모처럼 일이 없는 금요일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이 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100cc 스쿠터를 타고 봉하마을을 다녀오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제법 더운 날이어서 안에 티셔츠를 입고 밖에는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 걸쳤다. 바람막이 자켓은 모터사이클을 탈 때 입으면 남의 눈에 잘 띄어야 하기 때문에 밝은색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형광색을 선택해 구입했다.

평소에 쓰는 헬멧과 가볍게 낄 수 있는 노란색 가죽장갑을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스쿠터는 시속 50~60km로 느리게 달렸고, 달리는 속도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길가에는 드문드문 금계국 같은 꽃들이 피어있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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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우리 회사 취재팀이 가정집의 전기와 천막을 얻어서 기사를 작성하고 송고했던 골목. / 조재영 기자

 

함안에서 1004번 지방도를 따라 산인고개를 넘었다. 창원시 내서읍을 지나 회성동에서 교도소 뒷길로 접어들었다. 남해고속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구암동까지 가서 국립 3·15민주묘지 입구에서 중앙대로로 합류했다. 속도가 느린 스쿠터는 외곽도로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차량 통행이 적어서 더 안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차량 통행이 적고 길이 잘 뚫려있어서 시내 도로보다 차량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스쿠터에게는 더 위험한 측면도 있다.

창원역 앞을 지나고 용강고개를 넘어 동읍으로 향했다. 옆을 달리는 차들의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모두들 규정 속도를 위반하고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맨날 이륜차를 보고 "불법 운행을 일삼는다"라고 욕하지만 정작 따지고 보면 자신들도 이렇게 매일 불법 운행을 일삼고 있다. 그들 역시도 '준법'은 과속카메라 앞에서만 할 뿐이다. 20km/h 이상 과속은 11대 중과실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륜차 운전자들의 불법행위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은 불법이다. 고쳐야 할 점이다. 특히 이륜차의 인도 운행, 의도적 신호위반 등은 자신은 물론이고 남도 위험에 빠뜨린다.

세 번째 인연

창원 동읍에서 김해 진영읍을 지나 본산공단을 통과했다. 본산공단을 지나면 곧 봉하마을이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당시 자치행정부 소속으로 경남도청을 출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현장에 취재기자 3명과 사진기자를 봉하마을에 파견했다. 하루가 지난 뒤에 갑자기 봉하마을에 가서 현장을 총괄하라는 데스크 지시가 내게 떨어졌다. 원래는 시민사회부 경남지방경찰청 출입 기자가 가야 했지만 나는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다음 날 새벽에 봉하마을로 갔다. 차 뒷 트렁크에 접히는 자전거를 싣고 갔다. 차를 타고서는 마을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기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본산공단이 끝나고 봉하마을로 이어지는 지점에 빈 트레일러를 세워놓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 차를 세워두고 자전거를 꺼냈다. 노트북과 카메라를 둘러메고 자전거를 타고 논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이후로 나는 우리 취재팀이 봉하마을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며칠 동안 자전거를 타고 봉하마을과 본산공단을 오갔다.

마을에 가서도 문제가 있었다. 기자들이 취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천막이 하나 있었지만 첫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신문 방송사 기자들의 몫이었다. 노트북을 펼 자리와 전기가 필요했다. 마을 주민들은 기자들을 외면했다. 아니 증오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도록 몰아간 큰축의 하나가 언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측면도 있었다. 주민들은 KBS와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사 차량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기자들에게 물도 한 잔 주지 말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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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마을 옛 마을회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에 당선될 때 마을회관으로 쓰였고 그 뒤에 새 마을회관이 지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마을을 떠나는 것을 나는 저 건물 옥상에서 지켜봤다. / 조재영 기자

 

분위기가 그랬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현장 캡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을 마당 앞 2층 집 옆 골목 안쪽에 사는 할머니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할머니는 마을사람들이 알면 욕먹는다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손을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빨리 지갑을 열어 '전기세' 내고 전기를 쓰겠다며 '전기세'를 미리 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전기선 하나를 담장 밖으로 넘겨주셨다. 그리고 길바닥에 깔아 돗자리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천막도 하나 꺼내주시고, 노트북을 얹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작은 상도 하나 내주셨다. "우리 대통령 욕하지 말고 좋은 기사 써달라"는 취지의 말씀과 함께였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골목 길바닥은 그렇게 며칠 동안 나를 포함해 우리 회사 4명의 취재기자의 현장 사무실이 되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도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커다란 멜론 2개를 사서 할머니께 드렸다. '뇌물'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고마움의 표시였다.

노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봉하마을을 떠나는 순간에는 마을 전체가 눈물바다였다. 주민들도 울었고, 전국에서 자원봉사하러 왔던 이들도 울었고, 취재진들 중에서도 눈물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마을회관(지금은 폐관·마을버스 정류장 옆에 있다) 옥상에서 운구행렬의 움직임과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사모 회원이었을까? 운구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한 여성이 곁에 있던 다른 사람한테 기대어 어찌나 슬프게 울던지. 보는 사람조차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깨어있는 국민'들로부터 그만큼 사랑받던 대통령이었다.

그것이 나와 봉하마을의 세 번째 인연이었다.

첫 번째 인연

금요일인데도 봉하마을에는 관광버스가 들어올 정도로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도 평일이라서 북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묘역 입구와 잔디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화장실과 휴식 공간이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노무현기념관 앞에 스쿠터를 주차했다. 사람들이 다니는 데 방해되지 않는 곳에 세워두었다.

처음 봉하마을을 찾아갔을 때와 지금은 많이 변했다. 국민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봉하마을을 알게 된 것은 2002년이었다. 그해는 월드컵이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해이기도 했지만, 인권변호사였고, 5공 청문회 스타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당내 경선을 거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큰 아이가 태어난 해였다.

2002년 12월 19일이었다. 저녁 개표장에서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동료 기자 한 명, 사진기자 한 명과 함께 봉하마을에 있었다. 마을 마당에 방송사 중개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주민들은 그곳에서 개표방송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정쯤에 노무현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방송이 나오자 마을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개그맨 김종국 씨가 중개차 앞에서 이런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그 모습은 TV 화면을 타고 나왔다. 그날 밤은 서리가 내렸고 달이 무척 밝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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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2월19일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있는 선영에 참배하고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 뒤에 문재인 현 대통령이 내려오고 있다. 손에 수첩을 들고 있는 사람이 나다.

 

다음 날 아침 당선자 노무현이 고향 봉하마을 찾았다. 그는 그의 형님과 함께 마을회관 옆 구릉에 있는 선영에 가서 참배하고 내려왔다. 그의 곁에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고 지금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대통령 문재인이 곁에 있었다. 나도 취재수첩을 들고 그들 선영 참배 대열에 끼었다. 당선자 노무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받아적기 위해서 바짝 붙어 다녔다. 나중에, 당시 현장에 있던 사진부 선배가 선영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대열에 내가 끼어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주셨다. 그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블로그 이웃들이 한결같이 "경호원 같다"고 해서 혼자서 실실 웃은 적이 있다. 그게 나와 봉하마을의 첫 번째 인연이었다.

두 번째 인연

더워서 바람막이 자켓을 벗었다. 잔디광장을 지나 등산로를 따라 봉화산에 올랐다. 봉화산 오르는 길은 수월하다. 돌이나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서 체력만 있으면 나이가 많은 분들도 얼마든지 오를 만하다. 등산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작은 폭포가 하나 있고, 거기서 조금 더 오르면 옆으로 누워있는 마애불이 있다. 사실 누워있다기보다는 쓰러져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애불은 옆으로 누운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바위가 똑바로 서 있었을 것이고, 그 바위에 누군가 마애불을 새겼는데 그 뒤에 바위가 옆으로 넘어졌을 것이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부엉이바위로 가는 갈래길이 나온다. 부엉이바위는 노 전 대통령이 몸을 던졌던 곳이다. 부엉이바위로 갔다. 바위 끝부분으로는 아무도 갈 수 없도록 사방에 울타리를 쳐서 막아놓았다. 아마도 2009년 5월 23일 새벽 부엉이바위 끝에 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심정도 그랬으리라. 어느 쪽으로도 출구가 없이 사방이 막혀버린 공간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리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바위 끝뿐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를 바위 끝으로 향하게 했는가? 세월호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봉화산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와 사자바위가 있다. 마을에서 보면 봉화산 능선 끝에 툭 튀어나와 있어 도드라지게 보이는 곳이다. 그 모양이 진영·진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머리 모양이어서 사자바위라고 부른다. 실제 높이는 140m 정도로 높지 않지만 들판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남쪽과 서쪽 북쪽을 거침없이 조망할 수 있다. 또 노 전 대통령 묘역을 비롯해 봉하마을과 주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봉하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꼭 한번 올라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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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등지고자 몸을 던졌던 부엉이바위. / 조재영 기자

 

봉화산 동남쪽에는 화포천이 있다. 생태하천으로 잘 가꾸어놓은 화포천과 그 주변도 사자바위에서는 잘 보인다. 봉화산에서 내려와서 둘러 본 화포천은 마치 창녕 우포늪의 한 부분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을에서 화포천 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은 좁은 농로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자동차가 한 대 오면 상대방은 한쪽으로 비켜나 있어야 한다.

2008년 2월 25일, 임기를 마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돌아왔다. 그때도 나는 봉하마을로 갔다. 오전에는 흐렸다. 봄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해가 나지 않아서 추운 날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마을에 도착해 마을마당에 만들어놓은 무대에 올랐을 때는 이슬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른 노 전 대통령은 웃으면서 "야~ 기분 좋다!"라고 외쳤다. 그렇게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40분 넘게 이어진 듯했다. 연설을 수첩에 받아적기를 포기하고 녹음만 했다. 추워서 손가락이 꽁꽁 언데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흥이 나서 연설이 길어지자 자신의 옆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있던 경호원에게 옆에 있지 말고 저쪽으로 가서 쉬라고 했다. 그는 그만큼 '사람 냄새' 나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신이 나서 끝없이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추웠을 뿐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따 영감! 이제 그만 얘기하고 들어가시지…. 추워죽겠구만." 그땐 그랬다. 그리고 그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후에는 신이 나서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그리워졌다. 그것이 봉하마을과 나의 두 번째 인연이었다.

봉화산에서 내려온 나는 묘역 입구 쉼터에서 신발을 벗어놓고 벤치에 누워 잠시 낮잠을 잤다. 나는 잠자리에 아주 민감한데도 그 자리는 편안했다. 비록 30분이었지만 꿀잠이었다.

봉하마을과 나의 인연이 2009년으로 끝난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언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또 이어질지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적어도 1년에 한 번쯤은 봉하마을을 찾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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