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서 왔어.”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에서 주인공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아한 대답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극 중 혜원은 서울에서 홀로 자취하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20대 여성이다. 혜원은 함께 공부하던 남자친구만 시험에 합격하자 자괴감에 빠졌다. 끼니조차 챙겨 먹지 못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왈칵 서러움이 몰려왔다. 빡빡한 도시의 일상을 중단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혜원의 ‘소확행’이다.

‘소확행(小確幸)’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덴마크의 ‘휘게(hyugge)’나 스웨덴의 ‘라곰(lagom)’과 맞닿아 있다. 사실 소확행이라는 말은 요즘 새롭게 등장한 단어가 아니다. 1986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팬티가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면 냄새가 솔솔 풍기는 흰 셔츠를 머리부터 뒤집어쓸 때’ 느끼는 기분, 그 즐거움을 소확행으로 묘사했다. 이런 기분은 온 세상이 부러워할 큰 성공을 하여 느끼는 가슴 벅찬 행복이 아니라, 작고 소소하지만 그 묘사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상에서의 행복이다.

이 단어가 강산이 세 번 바뀌고 나서 다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확실성이 떨어진 상황에서 적은 비용으로 행복을 극대화해 만족감을 느끼는 방법이 ‘소확행’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2030세대의 삶을 대변해준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에 지친 젊은이들이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소확행에 열광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소확행을 추구하는 시대의 도래가 반갑다. 무엇보다도 과거 산업화 시대를 산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던 획일화된 행복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하면서도 개별적인 행복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연봉이 높은 직장을 구한 뒤 아파트 평수를 넓힐수록 행복이 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소확행 시대에서 행복의 기준은 사회가 아닌 개개인이 정하는 것이다.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행복들이 무한하게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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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퇴근길에 카페에 들러 맘에 드는 원두를 고른 뒤 정성스럽게 갈아 베란다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머리를 댔다. 그리고 기다리던 작가의 전시 일정을 체크해 두었고, 새로 나온 향초를 사려고 인터넷 쇼핑을 했다. 나만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러한 ‘소확행’ 경험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삶이 더욱 풍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청년들이여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부디 소확행이라도 가져보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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