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에 생명력 불어넣은 '20대 열정과 패기'
동네친구 삼삼오오 모여
창원문화협의회 창립해
1959년 11월 첫 행사 마련
5회 땐 7000명 모이기도
8회 끝으로 명맥 끊겨
"물질적 개발 중요하지만
문화 창작 활동 더 중요"

한때 지방예술제가 유행처럼 생겨나던 시기가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터전 위에 삶은 계속됐다. 민생을 돌보기보다 권력에 집착한 정치가 전쟁 폐허보다 더 피폐했던 시기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현대사의 숨 가쁜 달음박질 속에서 지방예술제들이 피어났다. 1963년 4월 15일 <동아일보>는 '고을마다 전통과 정서 담고 예술제 붐'이란 제목으로 지방마다 경쟁적으로 향토예술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중 경남 것만 보면 진주 개천예술제와 함께 밀양예술제, 사천예술제, 김해 가락예술제에 이어 창원 향토예술제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촌구석'인 창원군에 비해 대도시였던 마산시에서도 1956년부터 마산종합문화제가 열리고 있었지만, 따로 소개되지는 않았다. 창원 향토예술제가 그만큼 체계적이고 규모 있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예술제를 주도한 이가 지난 편에 소개한 창원 지역 문화 일꾼 김종하(金鍾夏·1936~2002)와 그 친구들이다.

제2회 창원 향토예술제를 준비한 청년들. /김세욱

◇20대 청년들 창원 향토 문화를 일으키다

김종하는 조각가 김종영 선생의 사촌 동생으로 김씨 고가(현 김종영 생가)에서 태어났다. 한평생 지역에서 문화 활동에 힘쓴 그가 1991년 창원문화원에서 발간한 <창원문화지> 창간호에 '창원문화의 태동 창원문화제 역정'이란 제목으로 쓴 글을 보자. 그는 창원 향토예술제를 창원문화제로 표기했다.

"1959년 7월 어느 날 서울법대를 졸업, 귀향한 김철현 향우가 필자의 집으로 방문, 평소 자기 신념인 향토문화운동에 관한 일단을 피력하여 필자와 함께 여러 날 숙의를 거듭하였다. 우선 평소 자주 만나 뜻을 같이하는 향우들과 자리를 같이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를 얻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 1959년 7월 중순경 창원 중동 소재 경원반점에서 김철현, 정인선, 권영수, 정명복, 홍정수, 김종하 여섯 사람이 회합하여 (중략) 그 자리에서 바로 문화단체를 결성, 제1회 창원문화제 개최에 관한 구체적 사항까지 논의되어 임시 사무실과 사무 책임자를 정하게 되었다."

1963년 열린 제5회 창원 향토예술제 개막식 모습. /김세욱

창원 향토예술제는 이렇게 20대 초반이던 동네 친구들의 도원결의로 시작됐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1959년 9월 창원 청년 19명이 참가한 가칭 창원문화협의회 창립총회를 연다. 지난해 타계한 도예가 곡우 진종만 선생도 창립 회원이다. 그리고 창원 예술제 준비위원장에 김철현, 부위원장에 정인선, 사무국장에 김종하를 선출한다. (참고로 김철현은 이후 서울에서 경무관을 지냈고, 정인선은 경남도 교육위원이 된다.)

이들은 이해 11월 예술제를 열기로 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당시 창원교육청 보조금, 창원군 보조금으로는 예산이 빠듯했다. 그래서 사무국장 김종하, 섭외부장 권영수를 서울로 보내 창원 출신 유력 인사를 찾아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제1회 창원문화제 막 오르다

1959년 11월 17일 오전 10시 창원국민학교(현 창원초등학교) 교정에서 제1회 창원 향토예술제 개막식이 열린다. 이해 12월 재경창원군학우회가 발행한 잡지 <창원> 4호에 실린 개막식 르포 기사를 보자.

"맑게 개인 가을 하늘 아래 각계 인사와 군내 각 학교 학생 및 교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식전에는 먼저 오색도 찬란하게 하늘을 물들인 축포가 있은 다음 대회장 주정문 씨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어 각계 인사의 축사와 축전 및 격려사가 있었으며 특히 동석상에서 애향의 시 가작으로 입선한 서보영 씨의 '의창의 노래'가 발표되어 이채를 띄었다."

당시 대회 취지문에는 이른바 문화 소외 지역인 농촌 청년들이 지역 문화를 일으키려고 나선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빛나는 창원의 산천, 질펀한 창원의 푸른 들에서 우리는 자랐고 우리의 살이 오르고 뼈가 굵었다. 그러나 우리의 향토는 메마르고 가난해졌으며 피폐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중략) 먼저 물질적으로 재건과 개발도 긴요한 일이겠지만, 이보다 문화적 창작 활동과 개발이 더욱 요청되는 바이다. 이에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이의 열의와 패기를 묶어 이에 제전을 마련한다."

1965년 제7회 창원 향토예술제 개막식 매스게임 공연 모습. /창원의 옛모습 사진집

◇풍성했던 문화 예술 행사들

창원 향토예술제는 3일간 진행됐다. 주로 예술 경연대회 형식이 많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분야가 늘어났다.

구체적으로 문학부, 음악부, 미술부, 변론부, 사진부, 농악부, 가요부로 나눠 학생 대상 사생실기, 독창·합창 대회, 웅변대회가 열렸다. 성인 대상으로는 가요콩쿠르, 궁술대회, 미인선발대회가 있었다. 2회에 처음 열린 경축마라톤대회에서는 당시 창원중 2학년 박봉근 선수가 1위로 들어왔다. 이후 박봉근은 1970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안게임 1만m 종목에서 동메달을 땄다.

심사위원들도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문학에 김수돈·정진업, 음악에 조두남·이수영, 미술에 최운·유택열·김종문·진종만 같은 이들이다. 1963년 9월에 열린 5회 때가 가장 성황리에 열린 것으로 보인다. 김종하는 이때 7000명이 모였다고 기록했다. 임성희 공보부장관, 문홍주 법제처장, 윤태림 문교차관, 김성은 국방장관 등 장·차관도 4명이나 참석했다. 당시 지역에서 열리던 문화제로서는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창원 향토예술제는 1966년 11월 5일 열린 8회를 끝으로 맥이 끊긴다. 이유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5·16군사정변 후 사회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창원 향토예술제는 예술가가 아닌 지역 청년들이 열정과 패기로 만들어낸 행사였다. 8년 동안 창원 문화예술에 끼친 영향도 크다. 예술제가 사라지면서 바로 창원 지역 문화예술이 침체기를 맞는다. 창원 예술가들도 대부분 마산 문화권으로 흡수돼 버린다. 

※참고문헌

<창원 4호>(재경창원군학우회, 1959) <창원문화지 창간호>(창원문화원, 1991) <창원시사>(창원시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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